소외된 민중과 분단의 아픔을 주로 다뤄온 중견작가 김원일(56)씨가
처음으로 남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사랑아 길을 묻는다"(문이당)를
내놨다.

현대사의 굴곡을 묵직하게 그렸던 그간의 작업에 비하면 파격적인
변신이다.

작가생활 30여년동안 원고지만 고집하던 그가 "난생 처음" 컴퓨터로 쓴
소설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조선말기 암울한 상황 아래 운명적인 사랑에 휘말린 남녀의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를 뼈대로 삼고 있다.

주인공은 몰락한 양반가문의 중년 가장 서한중과 김참봉의 후실인
사리댁.

천주교 공소에서 사리댁을 처음 본 서한봉은 "잘 구운 항아리같이 그늘이
있듯 없듯, 그 살색이 달무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그녀에게 송두리째
빠져든다.

"소담한 백자그릇"이자 "밀어낼수록 차오르는 밀물"의 여인.

5년간의 애타는 가슴앓이끝에 그는 "한솥밥 먹고 살자"며 그녀를 데리고
야반도주에 나선다.

소설은 두 사람이 순흥땅을 떠나 참봉댁 머슴과 순검들의 추적을 피해
화전가 장터 탄광촌을 떠돌며 "순교"보다 힘든 "원죄"의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비춘다.

서한중은 "천주학쟁이"였던 아버지의 참수를 목격한 뒤 스스로를
난봉꾼으로 내몬 한량이다.

마음붙일 곳이 없던 그는 부인과 자식들을 팽개치면서까지 그녀와의
새 삶에 집착한다.

소작농의 딸로 늙은 참봉에게 팔려간 사리댁 또한 전처자식들의 냉대에
시달리던 "별당 감옥"의 수인이었다.

그녀는 천주교리를 배우기 위해 한글을 깨치고 공소에 나가지 말라는
시댁의 반대에 다섯달동안 묵비권으로 맞서며 보름간 단식까지 감행했던
여인.

그러나 이들의 여정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서한봉은 현상금을 탐낸 포수들에 의해 한쪽 다리를 절게 되고 활빈당에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천주교 성지에 몸을 숨긴 사리댁을 만나 겨우
건강을 회복한다.

장터를 떠돌다 탄광촌으로 들어가지만 사리댁의 한쪽 눈이 멀고
서한봉마저 활빈당 산채에서 먹은 독초때문에 몸져 눕게 된다.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산달이 가까운 사리댁의 눈을 치료하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약을 달여 먹이던 서한봉은 결국 앞 못보는 "아내"를 남겨둔
채 한많은 이승을 뜬다.

가정과 종교, 도덕과 규율의 "금줄"을 제치고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두 사람.

작가는 불륜과 배교의 원죄의식에 괴로워하면서도 성속의 경계를 넘어선
이들의 애절함을 가슴시린 절창으로 승화시킨다.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굴레인 사랑의 힘이 원숙한 그의 문체에 실려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세계화의 그늘에서 우리의 옛 정조를 찬찬히 돌아봤다"는 그는 "국운이
쇠했던 시절 그들이 벌인 사랑의 비감 속에서 지난 열달간 나도 무척이나
앓았다"고 말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29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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