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시인 김수영(김수영.1921~68)의 시 "거대한 뿌리" 일부다.

그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 4.19 등 격동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지나온 시인.

그가 세상을 떠난지 30주기(6월16일)를 맞아 김수영 문학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최동호(고려대 국문과 교수)씨는 계간 "문학과 의식"
여름호에 발표한 논문 "김수영의 시적 변증법과 전통의 뿌리"에서 김수영의
시적 전환이 "거대한 뿌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최씨는 이 시를 통해 과거의 부정에 대한 부정으로 긍정에 도달하는 김수영
문학의 참모습을 일깨우면서 시 속에 등장하는 버드 비숍 여사에게 렌즈를
맞춘다.

비숍은 19세기말 조선의 실상을 놀랍도록 상세하게 관찰하고 돌아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898)을 펴낸 영국 여성.

최씨는 4.19 이후 사회혼란에 비애감을 느끼던 김수영이 그녀의 영문판
저서를 읽고 새로운 빛을 발견했다고 분석했다.

비숍의 인식이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으로 바뀌었듯이 김수영 또한
"절망과 진창의 역사"에서 "추억 인간 사랑"의 변증법으로 승화됐다는
설명이다.

최씨는 또 "김수영이 자유에 유달리 집착한 이유는 인간적 자기완성을 위해
억압과 속박을 떨쳐버리자는 몸부림"이었다고 해석했다.

문학사적으로는 "30년대의 초현실적 모더니즘 시가 50년대 과도기를 거쳐
60년대 김수영에 와서 명쾌한 논리적 정당성을 민중의식 속에 뿌리내린
참여시로 진일보했다"고 평가했다.

김상환(서울대 철학과 교수)씨는 "세계의 문학"여름호에 발표한 논문
"김수영의 역사 존재론-교량술로서의 작시에 대하여"에서 전통과 현대,
근대와 전근대를 잇는"다리"역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가장 김수영다운 작품으로 "현대식 교량"을 들고 김수영이야말로
한글세대 이전과 이후, 도시와 농촌, 주지주의와 감성주의, 근대와 탈근대를
연결하는 가교라고 평가했다.

유중하(연세대 중문과 교수)씨는 "실천문학"여름호의 "달나라에 내리는
눈"을 통해 시인의 일상모습과 꼿꼿한 선비정신을 작품과 함께 분석했다.

김수영의 초기작품에 나타난 치욕 수치감 부끄러움 등의 뒤틀린 이미지는
고달프고 찌든 생활상과 관련이 깊다는 주장도 들어있다.

< 고두현 기자 kdh@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