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연극계의 화두는 "97 세계연극제"였다.

1년전부터 연극협회를 중심으로 세계연극제 사무국을 설치하고 각종
준비를 했으나 정작 펼친 잔치에는 손님이 모이지 않았다.

애써 공연장을 찾은 관객은 연극계 종사자나 연극전공 학생들 정도.

한마디로 실패였다.

객관적 수치가 이를 잘 드러낸다.

총관객수 30만여명중 18만여명이 무료공연인 세계마당극큰잔치에 몰렸다.

연극제의 핵심부문인 해외공식초청 연극 무용 음악극에는 4만명, 그나마
유료관람객은 40%에 불과했다.

이로써 세계연극제 사무국은 2억여원의 부채를 떠안게 됐다.

다만 우수 외국초청작이 국내 연극인들에게 국제적 안목과 시야를 넓힐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점은 성과로 꼽혔다.

미국 라마마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 베네수엘라 라하타블라극단의
"아무도 대령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일본 가이타이샤극단의 "도쿄 게토"
등은 신선한 소재에 탄탄한 구성,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등으로 국내 문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97년 연극계에서 눈에 띈 또한가지는 창작극의 부진.

새 작품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대신 "칠수와 만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돼지와 오토바이" "파우스트" "고도를 기다리면" "욕망이라는
마차" "세상은 요지경"등 기존연극의 재공연이 줄을 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뮤지컬에서도 마찬가지.

"사랑은 비를 타고" "쇼코메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모스키토"
"파트너"등 재공연작들이 무대에 올랐다.

연극계 침체의 가장 큰 원인은 경제불황.

극단이 새롭고 수준높은 연극을 기획해도 지원해줄 기업이 없다 보니 돈
안드는 연극제작-수준낮은 연극 또는 히트작 재공연-연극팬 이탈-돈안드는
연극제작 등으로 이어졌다.

젊은세대의 고급문화 기피현상도 연극계를 침잠시킨 이유중 하나로
지목됐다.

TV와 영화등 영상매체에 익숙한 젊은층이 더이상 연극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추세는 연극의 주류가 바뀔 것이라는 전망을 낳고 있다.

화려한 율동, 웅장한 세트, 짧은 대화와 감각적인 노래등으로 무장한
뮤지컬이 정통극을 대신할 것이라는 얘기다.

단일작품으로 올해 가장 주목받은 것은 "명성황후"(에이콤).

창작뮤지컬로는 처음 브로드웨이에 입성, 뮤지컬 본토의 호평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오랜 준비기간과 뛰어난 배우의 캐스팅, 거액의 투자등이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국내공연작중엔 상반기엔 "남자충동", 하반기엔 "난타"가 5만명이상의
관객을 동원, 최대 히트작으로 기록됐다.

2편 모두 환퍼포먼스(대표 송승환)의 기획작.

환퍼포먼스는 간판배우 안석환씨가 97서울연극제 최우수배우로 선정되는
등 올해 가장 왕성하고 인상적인 활동을 펼친 극단으로 꼽혔다.

여성소재 연극이 많았던 점도 올해의 특기사항.

"어미" "나, 김수임" "그 여자 억척어멈" "이혼해야 재혼하지" "생과부
위자료청구소송" "히바큐샤 김영주" "별을 쥐고 있는 여자"등 예년의 2배
가까운 여성소재 연극이 공연됐다.

세계연극제를 관람한 페브르 다르시에 아비뇽연극제 준비위원장의
"한국 현대극중 아비뇽연극제에 초대할만한 작품이 없다"는 발언은
한국연극계의 과제를 그대로 드러냈다.

세계연극의 흐름을 잘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라는 지적이었다.

이를 극복하려면 "전통의 현대화"를 통한 "세계화"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연극인들의 자성이다.

윤호진 에이콤대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무대를 만드려면
전통을 세련되게 현대화하는 작업이 진행돼야 한다"며 "다양한 소재와
내용을 모색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치는 연극인 스스로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 박준동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