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작가들의 무게있는 소설집이 잇따라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문순태(56)씨가 7번째 소설집 "시간의 샘물"(실천문학사), 한승원(58)씨가
장편 "포구"(문학동네), 박범신(51)씨가 장편 "킬리만자로의 눈꽃"(해냄)을
각각 내놓았다.

문씨는 "타오르는 강" 이후 10년간의 공백을 깨고 지난 봄 장편 "느티나무
사랑"을 선보이면서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6.25부터 5.18까지 질곡의 한국현대사를 "고향"이라는 프리즘으로 비춰온
그의 주제의식은 이번 작품집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데올로기의 철사줄에 묶였던" 아버지시대의 고통스러운 삶을 80년
광주와 연계시킨 "시간의 샘물" 연작과 고향상실및 귀소본능을 다룬
"느티나무"연작등 9편의 중.단편이 담겼다.

"이 나이가 되도록 왜 이렇게 마음이 칼날처럼 날카로와 고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버지시대의 고통스러운 삶이 점액질처럼 끈끈하게 남아 나로 하여금
그 업의 매듭을 풀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몰락한 가족과 인간을 통해 역사의
진정성과 변혁의 의미를 탐색하면서 그속에서 훼손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극복해가는지를 "꿈길" "정읍사" "낯선 귀향" "흰 거위산을 찾아서" "최루증"
"녹슨 철길"등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감각적인 글쓰기가 유행하는 요즘 세대에게 "체험"의 깊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준다.

박범신씨의 "킬리만자로의 눈꽃"은 92년 출간한 "잃은 꿈 남은 시간"을
일부 고쳐 발간한 것.

93년 정체불명의 분열과 절망감에 괴로워하다 연재소설을 중단했던 그는
지난해 가을부터 작품활동을 재개, 최근 연작소설집 "흰소가 끄는 수레"를
내놔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킬리만자로의 눈꽃"은 자신을 찾아 아프리카로 떠난 작가와 그 아내의
이야기.

"흰소가 끄는 수레"처럼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고뇌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주인공 정영화는 20여년동안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킨 인기작가로
방송국에서 기획한 아프리카기행 다큐멘터리 리포터로 취재여행을 떠났다가
증발한다.

정영화가 실종되자 그의 아내와 애인,아들등 주변인물들은 화려한
인기작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시련을 통해
한층 성숙해간다.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에게서 자유로운 삶을 찾았다고 느끼던 정영화는 차츰
자신의 그리움과 갈등이 상상력의 우물이 말라 자유로운 글쓰기가 불가능해진
데서 온 것임을 자각하고 새로 거듭난다.

한승원씨의 "포구"는 올해 제정된 해양문학상 첫수상작으로 84년 발표된
뒤 절판됐던 소설의 개정판.

바닷가에서 태어난 그는 68년 등단 이후 줄기차게 고향과 바다를 무대로 한
소설을 발표해왔다.

최근에는 고향 근처인 안양면 율산마을에 집필실을 마련했다.

이 작품 역시 삶의 터전이자 생명력의 근원인 고향바다를 그린 것이다.

주인공은 "한"으로 상징되는 성진과 "풍요"로 대변되는 해숙이라는 인물.

한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들고 나는 포구사람들의 "감당하기
어려운 질곡과 번뇌 속에서 미치고 환장할 것같은, 그러면서도 아기자기하게
재미있는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고두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