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도 이렇게 무너질수 있는가.

잠깐 사이 꿈 속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막힌 일들이 우리 현실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갑작스럽게 닥친 이 참담한 현실이 우리를 가혹한 시련의 세계로 내몰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우리의 경제사태에 관해 장시간 다루는 외국 방송 뉴스 장면을 볼 때는
표현하기 어려운 수치감까지 느끼곤 한다.

물론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도 막연히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는 자위를
해보기도 하지만 그 충격이 너무 강해 아직 자기최면도 잘 안되는 지경이다.

우리 미술계에도 걱정스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많은 걱정들 속에서도 정말 우려되는 것이 있다.

진실로 심각하게 우려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너무나 어려운 여건속에서
간신히 다져놓은 우리의 미술 대중화라는 싹이 고사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국민성에 비춰볼때 일정 기간후엔 충분히 모든 것이 극복될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관심이 한번 위축되고 나면 원상태로 회복되기까지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물질적 조건들이 회복되고 심리적 상처까지 아물었을때 비로소 문화
예술 향유의 단계가 정상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계만을 걱정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너무 사치스런 일로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하기는 당장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걱정하는 마당에 미술계만이 안위가
우선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가 미술계라고 특별히 보호해 줄 여유와 능력은 아무리
뜯어봐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위기 앞에서 억지로 의연해지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무슨 그림 한두점 더팔고 못파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불황기에 그림을 사두는 것이 좋다고 말한들 호소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문화예술을 향유한다는 것, 혹은 즐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행복해지고자 하는 기본적 욕구의 일정한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삶의 질적인 고양을 위해 예술작품을 향유하고, 경제적으로
허용될 때 소유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 타성에 젖어들 때, 비정상적 소유욕의 표출로
왜곡 변질되곤 한다.

사실 우리의 미술시장이 지나치게 소수에 한정되는 소유나 구매에만
치중했지 대중들의 기본적 욕구에 대한 서비스는 소홀히 했다.

그 결과 비정상적인 가격 구조를 형성하기까지 하였다.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 미술 시장의 어려운 현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제야말로 다시 본질과 기본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반성과 다짐이
요구되는 것이다.

오히려 요즘같이 심신이 탈진해 있을 때 정말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동서고금의 전쟁중에도 예술은 있었으며 그것은 승리의 원동력이
되곤했다.

얼마전까지 경제적으로 환난을 겪었던 멕시코나 브라질같은 중남미
국가들이 그 위기를 잘 극복했던 것도 어쩌면 예술을 사랑하는 낙천적
국민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야말로 우리 삶의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정말 어려울 때일수록 의연하게 대처하는 문화시민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한때 졸부같은 모습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과거를 불식하고
반성하자.

문화국민의 자질과 긍지만이 우리의 참모습으로 비쳐질수 있는 전기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아무리 어려워도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잃지 말기를 권하고 싶다.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