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때/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너무나 좋아해서요./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그러면서 산에 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국화밭에 놓아 두곤/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
(서정주 "첫사랑의 시"전문)

"가을잎이 한잎, 두잎, 내리는/
혜화동 로터리 빨간 우체통 앞,/
고, 스톱, 빨간 신호등에 걸려서/
발을 멈추고 있노라니/
환히 웃고 돌아가는 모녀의 풍경/
아,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는 것을"(조병화 "엄마와 어린이"부분)

노시인들의 "소년"같은 시를 읽다 보면 겨울추위와 참담한 경제현실,
어지러운 정국으로 얼어붙은 가슴이 따뜻해진다.

서정주(82)씨의 시집 "국화 옆에서"(민음사)와 "80소년 떠돌이의 시"
(시와시학사)및 조병화(76)씨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동문선)이
잇따라 출간됐다.

이들 시집에는 바삐 지나온 한해를 돌아보게 하고 세속에 찌든 마음을
맑게 헹궈주는 "청언"들이 가득 담겨 있다.

서정주씨의 작품은 "색계"와 "무색계"를 넘어 지금도 "가즈런이 이쁘게"
이어지는 사랑의 풍경들로 채색돼 있다.

유년시절 집을 지키면서 바라보던 구름을 팔십이 넘은 지금까지 이고
산다고 노래한 "어린 집지기의 구름"이나 뿔뿔이 흩어진 자손들이 돌아오면
어릴적 흐렁흐렁 잠이 들던 마루에 앉아 그시절 뻐꾹새 소리를 듣고 있게
하리라는 "질마재의 내 생가"에도 과거와 현재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같은 시인의 꿈은 잿빛 하늘과 혼탁한 현실에 짓눌려 새로운
"희망의 처소"를 찾아 떠돈다.

"뻐꾹새들도/
가슴이 아푸다면서/
우리들의 산에선 떠나버리고,/
기러기들도/
눈이 아푸다면서/
우리들의 하늘에선 떠나버린다./
우리의 넋도 대기층 넘어/
천국이나 극락에 가서/
살수밖엔 없이 되었다./
하느님 보고/
실한 동아줄이나 하나 내려주시래서/
그거나 타고 하늘 깊이 들어가서 살아야만 하겠다."("요즘소식")

조병화씨의 시에는 이보다 더한 아픔이 감춰져 있다.

시집 "아내의 방"에서 암과 싸우는 아내에게 잔잔한 사랑을 들려준
그는 이번 시집에서 더욱 낮은 목소리로 슬픔을 삭인다.

"먼저 시들어간 생명체는/
시들어가며 아팠겠지만/
뒤이어 시들어갈 생명체는/
그것을 보며 더욱 쓰라리게/
그 애처로운 이별의 아픔을/
애절하게 애절하게 견디어야 하리"(조병화 "시들어가는 생명앞에서"부분)

그는 "기울어가는 아내의 생명 앞에서 혼자 살아갈 날의 여생을 생각하며
쓴 것들"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내 영혼의 숙소"에 바친다고
털어놓았다.

그 숙소에는 청춘의 아름다움과 노년의 경건함이 함께 잠들어 있다.

"모든 것, 신의 뜻대로 하겠지만 신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있을줄 안다"며
"어찌 작은 지혜로 거대한 인생/그 운명을 피할수 있으리"라고 되뇌이는
구절은 생각하게 한다.

"아,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날이 가고 날이 오는 먼 세월이/
그리움으로곱게 나를 이끌어 가면서/
다하지 못한 외로움이 훈훈한 바람이 되려니/
얼마나 허전한 고마운 사랑이런가"("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부분)

<고두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