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고개를 넘어서니 삶이 너무 짧게 느껴져요.

좋은사람들과 좋은 일만 하고 살아도 모자라는데 헛된 욕심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생-나의 오십자술"(한길사)를 펴낸 박한제(51) 서울대교수
(동양사학과)는 역사학자답게 "지난 세월의 거울로 미래를 비춰보자는
심정에서 부끄러운 얘기까지 풀어놓았다"고 말했다.

옛 선비들이나 중국사람들이 일정한 시기까지를 정리해 "~자술"을 남기는
경우는 많았으나 요즘으로선 드문 일.

이 책에는 어린시절의 추억부터 첫사랑에 얽힌 얘기, 고향 말몰이골짝
너머의 명주골 안개마을, 일본으로 공부하러 갈 때 공항에서 어머니가
봉투에 넣어준 한국돈을 들고 눈시울이 뜨거웠던 기억등이 담겨 있다.

15년이 넘은 고물선풍기와 20년된 싱크대, 합판장농등 삶의 더께가 묻은
얘기도 등장한다.

학교앞 동희반점에서 자장면을 먹으며 30년전의 첫사랑 동희를 떠올리는
풍경은 연구실 밖으로 소풍나온 듯한 역사가의 이면을 엿보게 한다.

연구하고 논문쓰는 일이 전부였던 그가 자기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가슴속에 묻어뒀던 얘기를 통해 지난일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여행계획"을
주변사람들과 함께 짜고 싶어서였다고.

"아는 이들과 돌려보려고 7부를 복사했는데 읽어본 동료교수가 출판사에
다리를 놓는 바람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아직 촌티를 벗지 못하고 세상살이에도 서투른 탓에 자주 뒤뚱거리는
스스로를 "손발이 안맞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제 전공인 위진남북조와 수당시대를 보더라도 역사속에는 균형잡힌
사람보다 나처럼 불균형스런 인간들이 더 많더군요.

그들에게서 위안을 얻습니다" "갑부가 된다기에"에 나오는 일화.

장인에게 빌린 8백만원에 2백여만원을 보태 주식시장에 넣은 돈은
절반으로 줄었다.

이처럼 "뒹구는 재주"마저 없이 13년째 25평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도
책 사는 돈은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모은 장서가 1만여종.그의 일상은 "99작전"으로 불린다.

일년 내내 오전9시에 도시락을 들고 연구실에 나와 저녁 9시에 퇴근한다.

"학술책과 논문을 쓰는 틈틈이 중국 장안에 대한 얘기를 준비중입니다.

로마가 서양문화의 중심이었다면 장안은 동양문화의 발원지였죠"

경남진영 태생인 그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대만 중국에서
중국사를 연구했으며 저서 "중국중세 호환체제연구"를 냈다.

<고두현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