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일은 늘 즐겁다.

아주 커다란 그림에서부터 철조각과 도자기 작품들, 판화와 소묘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무쌍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의 삶의 역동적 흔적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는 매일 매일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마치 밥을 먹듯 잠을 자듯 힘도 들이지 않고 그린 듯한 그의 모든
그림들은, 언제나 머물지 않고 또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가득차있다.

특히 말년의 소묘들은 그의 초기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진지한 현실
발언이나 입체파시대 이후의 독특한 형상 탐구등 화가로서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으로 그려내는 낙서의 천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 역시 어깨에 힘을 빼고,뭔가를 이해하고 알아내려는
지적인 태도보다는 그냥 맥놓고 즐기는 쪽이 좋을 것이다.

연필과 펜이 가는대로 주저없이 그어진 선들을 그냥 꿈을 꾸듯 따라
흘러가보라.

피카소의 말년 소묘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그림, 혹은 미술의 사명감을
그 속에 감춘 그림이 아닌 화가 자신의 놀이로서의 그림이다.

이 단계는 피카소 자신이 원하고 바라던 모든 형상세계를 이룩한 뒤에
오는 휴식으로서의 그림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의 말년 그림들은 비평의 영역을 넘어서 작가 자신의 노동과
놀이가 하나가 되는 행복한 세계이다.

피카소는 평생 담배도 술도 여자도 너무 많이 사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러운 것은 숨을 거둘 때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셀 수 없이 많은 좋은 그림들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생선의 머리와 꼬리와 몸통과 껍질까지를 아삭아삭 씹어먹듯이,
순간 순간의 삶의 기쁨과 고통들을 연료로 수많은 걸작을 남겨놓았다.

그 자신의 우울과 스트레스,그가 사랑한 여인들의 질투와 눈물과 고통과
불행이 모두 그의 그림 속의 땔감에 불과하다.

그가 만난 모든 사물과 풍경과 사람들에게서 빨아들인 싱싱한 피는
캔버스속에서 펄펄 뛰는 생명으로 살아있다.

극단의 이기주의자였던 인간 피카소, 그러나 위대한 화가 피카소-우리
시대의 그 누가 그의 발뒤꿈치나 따라갈 수 있을까?

그렇게 냉정한 프로페셔널의 세계를 보여주는 피카소의 그림들은 말년에
이르러 이렇게 어린아이같은 천진무구함으로 가득해진다.

그것들이 보여주는 짙은 에로티시즘은 다할줄 모르는 화가 피카소의
끈질긴 생명력의 마지막 연소일지 모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