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7일부터 "전환의 공간"이라는 타이틀로 개막된 호암미술관의 외국
현대미술 소장품들이 주목을 끌고 있다.

우리 기업들 가운데 문화투자가 가장 활발한 기업이 운영하는 것으로
그 컬렉션의 전문성과 안목이 널리 알려져 있는 터라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번 전시는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 외국 작품들의
소장 내용이 베일에 가려 있다가 드디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다.

면면을 보면 하나같이 세계 현대미술사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작가들의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으며, 그 질과 양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출품작은 33인의 작가 45점으로, 전후 모더니즘과 80년대부터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구분되고 있다.

전자는 드 쿠닝, 폰타나, 로드코, 워홀, 보이스, 스텔라, 저드, 라이만,
플래빈 등의 작품들이 돋보이며 후자는 폴케, 키퍼, 쿠넬리스, 홀저 등이
성공적인 컬렉션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서도 포스트모더니즘 회화를 말할 때 자주 등장하곤 하는
지그마 폴케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폴케는 1941년 폴란드 출생으로 53년 독일로 이주하여 현재 함부르크와
쾰른 등지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60년대부터 이미 요셉 보이스와 워홀, 리히텐시타인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진 폴케는 기성 오브제라 할 수 있는 직물 위에 표현적인 도상을 전개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특히 이질적인 요소들의 강제적 결합과 이종교배적인 화면의 구축,
분열적인 현대인들의 정신적 국면을 담아내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카나카스의 복수" (1980)라는 작품은 전형적인
폴케 회화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폴케의 작품들은 주로 무늬가 들어 있는 다른 천들을 연결하여 화폭으로
삼곤하는데,이 작품에서도 마치 중세 제단화를 연상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세개의 면이 서로 아무런 연관을 갖고 있지 않아 보이며 강제적
결합만이 목격될 뿐이다.

이미 상품 오브제로 주어진 직물 위에는 여러 가지 사방 연속무늬들이
드리워져 있는데, 특히 오른쪽 점 문양은 마치 리히텐시타인의 망점을
보여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좌우 양쪽의 화면들에는 나뭇가지나 지편을 대고 래커 스프레이를 하여
네거티브 형상들이 주어져 바탕의 문양들과 뒤섞게 한다.

그런가 하면 가운데 면 중앙에는 확실치는 않지만 마치 정령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 부적그림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전통적 의미의 통일성이 없다.

또한 기존의 문양과 그려진 그림 이미지들 사이에도 아무런 긴밀성이나
연관성이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이 상반된 분열 내지는 카오스 상태를 보이고 있다.

꿈틀대는 무의식의 욕망들이 기존의 사물이나 기호들의 체계에 스며들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폴케는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후기산업사회의 사회적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리얼리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직물의 패턴에서 보듯 무한궤도의 통일성과 연속을 보여 주고 있는
연속무늬들은 이제 열려진 판도라의 상자에 의해 와해되는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그에게는 또 하나의 리얼리즘인 것이다.

< 선화랑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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