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일반백성들은 봄에 쌀 1말을 빌리고 가을에 최고 5말의 이자를
냈던 것으로 확인됐다.

최승희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장(국사학과 교수)이 최근 "한국문화" 19호에
발표한 논문 "조선후기 고문서를 통해본 고리대의 실태"에 따르면 조선후기
채무자들이 부담했던 금리는 6~7개월에 50~5백%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후기 대출의 형태는 크게 장리 갑리 계 등 3가지.

장리는 춘궁기에 빌린 곡식을 추수후 곡식으로 갚는것이고, 갑리는 돈을
꾸고 원리금도 돈으로 내는 제도다.

장리는 10두에 5두씩 이자를 쳤으며, 갑리는 10량을 빌리면 만기에 20량씩
내도록 돼 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금리는 50~1백%였던 셈.

계로 모은 기금에서 대출을 해주기도 했는데 이때 적용된 금리도 50%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서민들을 짓누른 고리대는 이보다 최고 10배나 더 무거운
것이었다고 최소장은 분석했다.

채권자들이 봄과 가을의 곡물값 차이를 악용, 채무자들에게 원래 빌린
돈이나 곡식의 5배에 가까운 폭리를 취했다는 설명이다.

춘궁기에는 10량으로 2말밖에 못사지만 추수가 끝난 가을에는 쌀값이 떨어져
5~6말을 살수 있었다.

따라서 서민들이 빌린돈 10량에 이자 10량을 더한 20량을 갚으려면 가을에
무려 10~12말의 쌀을 팔아야 가능했다는 것.

쌀로 빌려 쌀로 갚으면 최고 1백%의 이자만 내면 됐지만, 돈으로 빌려
돈으로 갚으려면 쌀 2말에 대한 이자가 5백%(10~12말)에 달했다는 얘기다.

최소장은 "6개월에 5백%라는 살인적인 고리대로 농민들은 안정된 생활을
하기 힘들었고 결국 이들중 상당수가 유랑생활을 떠나게 됐다"며 "고리대가
조선의 사회기반을 허문 결정적인 요인중 하나였다"고 밝혔다.

< 박준동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