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이 저렇던가 몰라/바다에는 속절없이 눈이 내리네/어지간히
참았던/하늘의 이마를 스친 은은한 할 말이/겨우 생기면서는 스러져버려/
내목숨 내사랑도 저런 것인가" (바다에 내리는 눈)

지난달 8일 세상을 떠난 박재삼씨의 시선집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오상)가 출간됐다.

"청춘도 그렇고/사랑도 한때만/반짝 있는 체하더니/슬슬 빠져나가서/
하염없는 모래가 되어/그것이 밀려 허무만 쌓이더라"는 시인이 이승에서
거둔 마지막 수확은 무엇이었을까.

"대관령같은 곳에 가서/땅에서 익힌 거짓도 차츰 벗고/알몸뚱이로
이제는 진실을 들이밀까 보다/이를테면 빨갛게 익은 감의 빛깔을/이것이
이승의 수확이라고"

2년전 백일장 심사도중 신부전증으로 쓰러진 후에도 맑은 눈빛으로
자연을 응시하며 인간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던 그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이렇게 썼다.

"어쩌다가/땅 위에 태어나서/기껏해야 한 칠십 년/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이 기간 동안에/내가 만난 삶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 준/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그것을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나는
꺼져갈까 하네"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후배 시인들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한 칠십년"을 못 채우고 64세에 훌쩍
"꺼져 간" 시인의 영혼은 아직도 고향 삼천포 바닷가에 남아 지난날을
돌아보고 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가/바닷가에서 자라/꽃게를 잡아 함부로 다리를
분질렀던 것/햇빛에 반짝이던 물꽃 무늬 물살을 마구 헤엄쳤던 것/이런
것이 일시에 수런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대들어오누나/아, 나는 무엇을
이길 수가 있는가"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