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말부터 미국에서는 "흑인영화"라 불리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에디 머피, 덴젤 워싱턴, 웨슬리 스나입스등 흑인인기스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고 흑인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개념이 모호하긴 하지만 감독과 주연이 흑인이고 미국내 흑인들의 삶과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작품을 일반적으로 흑인영화라 일컫는다.

전형적인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영화는 작품성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스파이크 리 감독의 89년작 "똑바로 살아라".

이후 존 싱글턴이나 휴즈 형제등의 파괴적이고 실험성 강한 작품들이
계보를 잇는다.

흑인영화가 국내에서 극장에 걸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출시된 비디오도
스파이크 리의 "모 베터 블루스" "정글 피버", 존 싱글턴의 "보이즈&후드"
정도.

이런 상황에서 최근 작품성과 상업성을 적절하게 결합시킨 재미있는 흑인
영화 2편이 비디오로 나왔다.

스파이크 리의 최신작 "버스를 타라"(콜롬비아)와 F.게리 그레이의
"셋 잇 오프"(시네마트)가 화제작.

"버스를 타라"는 95년 10월16일 워싱턴D.C에서 열린 대규모 흑인집회
"백만인 행진"을 소재로 한 작품.

영화는 20명의 흑인이 "백만인 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LA에서
워싱턴까지 가는 사흘간의 여정을 다큐멘터리와 로드무비 형식으로 보여준다.

스무명의 승객은 90년대 미국 흑인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층을 대변한다.

흑인의 역사를 공부하는 늙은 학생, 독실한 크리스찬, 게이인 전직 해군
커플, 경찰, 배우, 비디오다큐멘터리를 찍는 UCLA학생, 범죄자, 반항아
등등.

이들은 3일동안 계속 말싸움을 벌이며 오해하고 반목을 거듭한다.

특히 게이커플을 향해 나머지 승객들은 악의에 찬 시선을 보낸다.

편견엔 같은 피부색이라도 다를 바 없다.

여행중 들려오는 대사는 유쾌하고 수다스럽다가 갑자기 슬프고 잔잔해지는가
하면 향수를 자아내기도 하고 때로는 철학적이다.

한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처지와 인생관을 털어 놓기도 한다.

결국 이들은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며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영화는 "똑바로 살아라"처럼 과격하거나 선동적이지 않다.

침착하고 담담하게 흑인들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의식속에 박힌
뿌리깊은 선입견과 패배주의, 인종차별등을 보여준다.

들고 찍기, 16mm 영화의 거친 느낌, 스피디한 편집등 스파이크 리 특유의
영화적 기교는 여전하다.

"버스를 타라"가 다큐멘터리식의 사실적인 영화라면 "셋 잇 오프"는 극적
상황이 숨가쁘게 펼쳐지는 감정과잉의 드라마.

L.A 빈민가에서 20년을 함께 살아온 4명의 흑인여자 스토니, 클레오,
프랭키, 엘리스.

구질구질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던 이들에게 한순간 어둠이
몰려온다.

프랭키는 자신이 근무하는 은행을 털러온 강도와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고, 스토니의 유일한 희망인 동생이 단지 피부색 때문에
도둑으로 몰려 경찰에 의해 살해된다.

클레오는 애인에게 좋은 옷을 사주고 싶지만 세상은 그녀를 조여오고
미혼모 엘리스는 유아보호국에 아이를 빼앗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른 이들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은행을 턴다.

우정 외에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의 마지막 선택은 처절한 액션으로 승화된다.

감독은 화려한 영상과 탄탄한 연출력으로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지만
이야기 전개가 작위적이고 결말부분이 상투적이다.

흑인영화에서 기대하는 참신함과 실험성은 떨어진다.

< 송태형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