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의 고운/황금비녀는/시집올 때 머리에/치장한 거죠/오늘 아침
그대에/드리는 뜻은/먼 먼 길 가시면서/잊으실까봐" (허난설헌)

사랑하는 낭군이 먼 길을 더나는데, 목숨처럼 귀한 비녀를 빼 주며
몸 성히 다녀오길 기원하는 여인의 마음이 전해온다.

속내를 들춰보면 "내가 보고싶을 때마다 비녀를 보며 부디 딴 생각
말라"는 의미도 깃들어 있다.

한시에는 사랑과 이별의 애틋한 정감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지만, 어려운
한자 때문에 일반인들에겐 여전히 "높은 문턱"으로 여겨진다.

최근 한시의 아름다움과 선현들의 맑은 글을 현대어로 옮기고 해설을
곁들인 에세이가 잇따라 출간돼 눈길을 끈다.

한양대 정민 교수 (국문학)의 "마음을 비우는 지혜"와 민족문화추진회가
엮은 허균의 "한정록" (솔), 수필가 심영구씨의 한시에세이 "눈물로 베개
적신 사연" (문학관), 대만출신 일본 소설가 진순신의 "중국 시인전"
(서석연 역.서울출판미디어) 등이 그것.

이들 책에는 어려운 시대를 살다간 현자들의 청언이 명징하게 박혀있다.

"마음을 비우는 지혜"는 "채근담" "소창자기" "신음어" "유몽영"
등에서 가려뽑은 "명청문인청언집"을 저본으로 저자가 번역.평설한 책.

청언이란 짧고 간결한 문장 속에 삶의 섭리를 담아낸 잠언문학의
일종이다.

욕망과 권세 앞에 눈 먼 요즘 세태와 관련,마음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맑은 언어의 메아리는 각별한 의미를 던져준다.

난세를 헤쳐온 지식인들의 고뇌와 행복을 갈구하는 마음이 현대인의
내면에 새로운 거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 마음으로는 만가지 일을 처리할수 있지만 두 마음으로는 한가지도
못이루니, 한 마음으로 만명의 벗과 사귈수 있어도 두 마음으론 한 벗도
못사귄다"

"젊은 시절 책읽기는 틈 사이로 달을 엿보는 것같고 중년독서는
뜰가운데 달을 보는 것같으며 노년독서는 누각위의 달구경과 같다. 모두
살아온 경력의 얕고 깊음에 따라 얻는 바도 다르다"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달팽이, 체액이 마르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는다.
탐욕스런 사람,제 몸 죽기 전까지 그칠줄 모른다"

"한정록"은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이 틈틈이 중국의 고서를
보면서 옛 선비들의 삶 가운데 교훈으로 삼을 만한 이야기들을 옮긴
일종의 독서록.

"숨어 사는 즐거움" "물러남의 지혜" "청산에 사는 뜻" "도인의 길" 등
맑고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론부터 도가의 양생술에 관한 내용까지 실려
있다.

"눈물로 베개적신 사연"은 남녀간의 애정과 세상사는 지혜에 관한 한시를
모아 오늘의 감수성으로 펼쳐보인 것.

허난설헌 이규보 임제 최치원 김삿갓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들의
작품이 현대어로 번역돼 있다.

시편마다 저자의 감성적인 에세이가 곁들여져 맛을 더한다.

"중국시인전"에는 굴원 두보 이백 소식등 중국 시인 27명의 작품이
독특한 언어감각으로 재구성돼 있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