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들면 그리운 맘 일고 볕 나가면 슬픔 밀려오는 밤이 잦다.
지상의 고통과 눈물을 쓸어 넣을 창고가 있다면
나는 사슴과 병아리와 토끼들의 겨울 양식을 넣어 둘 곳간을 짓겠다.
오늘 저녁 식탁의 푸른 시금치와 흰 소금들이 더욱 귀해 보이는 것은
구겨진 지폐와 나를 채찍질하던 굴종과 부끄러움이 내 삶을 빗질하기
때문이다.
길을 걸을수록 몸무게만큼 눌리는 신발의 분노
현관에 들어서면 견고하게 잠겨 버리는 나의 습관
우리의 하루는 햇빛의 시간을 늘이고 줄이며 흘러가고
손수건 한 장에도 마흔 해의 내 삶은
발목까지 속살까지 남김 없이 가리워진다.

시선집 "청산행"에서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