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에게 유럽 통합의 선구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그들은 대개 로베르
슈망이나 장 모네같은 프랑스 민주주의자들을 꼽는다.

이에 대해 영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존 래프랜드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일축한다.

소르본느대학 정치철학교수였던 그는 최근 출간한 "오염된 근원-유럽인들
생각의 비민주적 기원(원제 The Tainted Source-The Undemocratic Origins
of the European Idea)"이라는 책에서 "단일 유럽통화를 만들고 공통된
정책을 펴는등 유럽통합의 역사적 기원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나치즘 파시즘
등 전체주의"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최근 열렬한 유럽통합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나치와
파시스트들은 민족국가의 개념이 시대착오적이며 이는 초국가 연합으로
대체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히틀러의 이론적 지주인 괴벨, 1940년대 노르웨이의 전체주의자
퀴슬링등은 헬무트 콜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통합이
필수적이라고 선전하고 다녔다고 꼬집었다.

그는 "나치들과 파시스트들이 유럽통합을 주장하고 다닌 배경에는
침략의 발톱을 교묘하게 위장하려는 술책이 깔려있었다"며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 유럽통합론에도 비민주적 요소가 상당히 내포돼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런 역사적 과오를 알고 있는 유럽인들이 왜 통합하려고
애쓰는가.

래프랜드는 이를 "유럽인의 비겁함"으로 해석한다.

그는 "저성장 고실업률 부정부패등으로 고생하고 있는 유럽인들은 더이상
혼자서는 미국및 일본과 경쟁할수 없다고 보는 겁쟁이들"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다소 과격하게 들리는 그의 주장은 유럽보다 미국에서 더욱 의미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타임"최신호는 서평에서 "그의 생각은 유럽통합이 유럽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으며 민족국가 개념이 쉽게 용도폐기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부각시켰다"고 평했다.

< 박준동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