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울 때, 쓸쓸할 때 나는 이태준(1904~ )의 단편소설을 즐겨 읽는다.

그 중에서도 중편 "해방전후"는 언제 읽어도 마음의 위안이 되고 있다.

30년대 작가 가운데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역시 상허 이태준이
아닐까 싶다.

나는 중학시절부터 이태준에 매혹되어 "까마귀"니 "달밤" "돌다리"같은
단편집을 읽고 또 읽었다.

"해방전후"는 세상이 어렵고 험난해서 내가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읽으면 참으로 이상한 마음의 힘이 생기는 것이었다.

현이라는 주인공은 바로 작자자신이다.

해방전후의 작자자신의 삶, 그것이 현을 통하여 솔직히 고백되는 곳에 이
책의 품격과 문학성 혹은 사상성이 훌륭히 나타나 있다.

그 진실이 감동을 자아낸다.

한 지식인이 일제식민지하에서, 또 좌우로 분단되는 민족의 비극 앞에서
행동과 사유를 어떻게 하며 무엇을 가장 아프고 고통스럽게 체험해 가고
있는가를 "해방전후"는 말하고 있다.

작가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을 그려내는 경우란 드물다.

작가란 흔히 자기자신을 감추는 탓일까.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까지도 드러내 고백한 작가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신문학 1백년 가운데 채만식과 이태준 정도 아닐까.

이런 뜻에서라도 "해방전후"에 흐르고 있는 민족정기에 새삼 접해 볼만한
것이다.

어떤 문학청년 보고 "해방전후"를 백독하라 했더니 책 한권을 백독까지
하라느냐며 비실비실 웃기에 "백독이 끝나는 날로 당신은 훌륭한 작가가 될
것이오"라고 단언하고 물러섰다.

이 책에는 문장 쓰는 법과 작가가 나아갈 길, 어떻게 살며 또 행동해야
할 것까지 다 적혀 있다.

오늘날의 침체 속에서 우리는 각기 양심과 행동의 문제를 잠시 고찰해
봄직도 하거니와 이런 시기에 선배들이 딛고 간 피어린 길을 한번 돌아다
보는 일이 결코 무익하지 않을 터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