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시골마을에 미모의 여인이 "연분홍 치마를
봄바람에 휘날리며" 나타난다.

땅을 빼앗긴채 부모의 손을 잡고 야반도주한 어린시절의 일을 떠올리는
그녀.

복수의 눈초리를 숨긴 채 섹시함과 사근사근함으로 뭇 남정네의 마음을
녹인다.

KBS2TV 미니시리즈 "봄날은 간다" (월.화 오후 9시50분)는 개발바람을
겪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요즘 이야기지만 분위기는 지난날의
토속적인 문예영화를 닮아 있다.

마을사람으로 등장하는 이대근 남포동 양택조 박혜숙 신신애 등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캐릭터를 보여주고 카메라는 이들의 몸에 밴
연기를 정직하게 잡는다.

타지에서 온 미모의 여인 이휘향과 사기꾼 김영철이 불어넣은 바람에
순박한 마을사람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둘리는 모습에서 웃음과 해학을
끄집어 내려고 애쓴다.

아직 중심인물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전인 초반부가 진행된
상태지만 이야기는 담담하고 밋밋하게 전개된다.

화면에서 카메라와 조명의 기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연출을 맡은 이영희PD는 "바람이 불어도" 등 일일연속극에서 보여준
분위기를 그대로 끌어온다.

줄거리 중심으로 극을 이끌기보다는 관록의 개성파 연기자들이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질퍽한 사람살이에서 유발되는 잔재미에 승부를 건
것처럼 보인다.

김호진과 김규리, 김규철과 박선영 등 젊은이들의 사랑도 양념으로
곁들여진다.

트렌디풍이나 극적인 사건 중심의 파란만장한 드라마가 미니시리즈의
대부분을 차지해온 현실을 감안한다면 "봄날은 간다"는 분명히 파격적인
시도다.

젊은층에 맞춰 화려한 감각으로 포장된 드라마에 싫증난 중장년층을
잡기 위해서인지 의도적으로 촌스런 냄새를 풀풀 풍긴다.

미니시리즈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온 KBS의 또다른 승부수로도 보인다.

하지만 노름빚으로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술수를 부리는 여인,
단순하고 희화적으로 그려지는 토착민들, 뺀질한 사기꾼에 의해
마을전체가 속아 넘어갈 뻔하는 스토리등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신세대는 고사하고 중장년층의 시선을 붙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 송태형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