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정부는 1800년대 혁명이후 귀족들이나 교회가 소장했던 미술품들을
기증받아 곳곳에 많은 공공미술관을 만들었다.

귀족이나 교회는 자신들의 작품을 영구히 잘 보관할수 있는 곳은 공공미술관
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가장 정확한 판단이었다.

물론 기증을 할 때는 작품을 분산시키지 못한다는 조건을 문서로 받아놓거나
미술관에 특별실을 만들고 작품앞에 기증자의 이름을 명시할 것을 요구한다.

경우에 따라 기획전을 마련하여 기증자에 뜻을 기리기도 한다.

미술품 기증의 경우 보통 세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개인 컬렉터가 평생 모은 소장품을 특별한 계기에 기증하게 된다.

그러나 한평생 열심히 모아온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프랑스정부는 사회적으로 메세나정신을 고취시키는 분위기를
조성, 작품기증을 유도하고 작품을 기증했을때 기증 확인서를 발행하며
소득세 공제혜택을 주거나 자손들에게 미술관에서 할수 있는 여러가지
서비스 혜택을 준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개인 기증자로는 컬렉터인 다니엘 코르디에를 들수 있다.

지금 퐁피두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Made in France : 1945~1997" 전시
에도 그의 작품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둘째는 작가가 죽기 직전 작품들이 분산되지 않도록 기증하거나 사후에
유족이 기증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들면 로댕이 그런 케이스다.

로댕은 생전에 기증을 하려고 했을때 올바른 평가가 내려지지 않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후에 국가가 기증을 받아 미술관을 세웠다.

로댕미술관은 오늘날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가는 명소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부르델, 부랑쿠지 등 조각가들의 경우 기증을 통해 자신들의
아틀리에를 미술관으로까지 격상시키기도 했다.

최근에 파리의 퐁피두미술관을 찾아간 사람들은 미술관 바로 앞에 새롭게
문을 연 브랑쿠지의 아틀리에를 방문하고 감명을 받는다.

루마니아 태생의 브랑쿠지는 28세에 파리에 정착한 이후 81세의 나이로
57년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56년 브랑쿠지는 자신의 스튜디오와 조각품 스케치 가구 연장 책 레코드 등
자신이 아틀리에에 소유하고 있던 모든 물건들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면서
현대미술관측에 자신의 아틀리에를 그대로 재현시켜 다시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다.

그의 스튜디오는 77년 퐁피두미술관 바로 앞에 세워졌으나 아틀리에를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에 관람객들이 작품들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할수 있도록
되어 있어 작품의 보존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3~4년 후에는 문을 닫았다.

퐁피두미술관 건립 20주년 기념일인 지난 1월31일에는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개축한 그의 새 아틀리에가 탄생했다.

작가가 살아있을 때의 아틀리에 모습을 작품들과 함께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정말 감동적이다.

브랑쿠지는 특히 조수를 두지 않고 혼자 모든 작업을 한 작가로 유명하며
아틀리에의 작품배치도 늘 공간을 고려하여 잘 조화되도록 디스플레이했다.

한쪽 방에는 생전의 아틀리에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어 여러
시기의 작품들을 볼 수도 있다.

셋째는 미술품 상속자들이 상속세의 일부로 기증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증여(Dation)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피카소 미술관으로 요즘 대부분의 프랑스 미술관은 이러한
형태로 건립되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현대미술가인 피카소는 스페인 태생임에도 불구하고 20대
초반부터 파리에서 활동을 시작, 파리를 국제미술의 중심지로 부상시킨
작가이기도 하다.

피카소미술관은 회화 조각 드로잉 등 그의 작품세계를 볼수 있으며 언제
들러도 피카소 작품을 중심으로 한 특별 기획전을 볼수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68년 세법 개정이후 세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작품수집을
하고 있다.

작가가 죽은 후에 유족들은 상속세를 작품으로 내놓아 국가는 다량의 작품을
확보하게 된다.

이 일은 문화부와 재무부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증여대상 작품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가 평가를 한다.

한국도 문체부와 국립현대미술관이 적극적으로 나서 기증 또는 증여를 유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 갤러리 현대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