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소설가 구보씨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

마룻바닥을 쿵쾅거리며 걷는다.

세수하는 소리가 안방까지 들린다.

아침식사하자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쾌활하다.

오늘은 다름아닌 구보씨의 월급날.

신문사로부터 한달치 연재소설의 고료를 선불로 받는 날이다.

지금까지 소설다운 소설을 펴내지 못해 돈벌이가 쉬원치 않았던 그에게
뭔가 한건 할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아침밥 먹으면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녀석에게 갖고 싶은거 없느냐고
묻는다.

녀석은 대뜸 비디오게임기를 사달라고 한다.

아내가 직장에 출근하면서 뭐 좋은일 있느냐고 한다.

구보씨는 빙그레 웃는걸로 대답을 갈무리한다.

지금 말해 버리면 재미없지.

암 그렇지.

구보씨는 신문사에서 소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후 발걸음도
가벼웁게 거리로 향한다.

은행에서 돈을 찾는다.

동장군의 당찬 기백이 한풀 꺾인 나른한 겨울 오후다.

천천히 걷는다.

공중전화에서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오래간만에 시내에 나왔는데 데이트나 하자고.

구보씨 아내는 처녀때부터 극장영화를 좋아했다.

구보씨는 영화는 좋아하지만 영화관엔 질색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숨소리, 속삭이는 소리, 오징어 씹는 소리를 혐오하는
그다.

오늘은 그 둘이 기가막힌 타협을 도달한다.

비디오방을 개발해낸 것이다.

조용한데서 영화를 볼수 있으니 꿩먹고 알먹고 하는 셈이다.

뭘 볼까.

화끈한 액션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더록" "히트" "미션임파서블" "인디펜던스 데이" "007골든아이"같은
대작이 쏟아져 나와 있다.

"매직에로티카" "레드슈다이어리" "옥방비별"같은 에로물도 눈요기감으로
만만치 않게 도전하고 있다.

비디오로는 액션이나 에로가 역시 최고지.

저쪽편에서 비디오를 고르는 아내의 눈길은 자못 진지하다.

"클레오파트라" "마이 페어 레이디" "로마의 휴일"같은 고전드라마에서
뜸들이고 있다.

한참동안 그러다가 마침내 하나 집어들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눈뜰때".

오늘은 내가 참자.

비디오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지루하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제목에서 상상한 야한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소년의 성에 눈떠가는
과정이 서정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비디오 내용은 이랬다.

7살배기 꼬마 게스터는 엄마가 피아노 연주여행을 하는 여름동안 시골
할머니 집에 보내진다.

사촌누나 헬가는 게스터에게 바이킹무덤에 얽힌 전설을 얘기해 준다.

온갖 보물이 묻혀있는 그 무덤을 파는 사람에겐 집이 불타는 저주가
따른다는 것이다.

어느날 게스터는 사촌누나가 그녀의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목격한다.

충격을 받은 게스터는 헬가가 괴물에 납치된 공주고 자기는 공주를 구해줄
바이킹 전사라는 상상에 사로잡힌다.

게스터는 헬가를 구하기 위한 행동에 착수한다.

헬가의 결혼식날 뭔가를 꾸미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사랑에 대해
깨닫게 된다.

구보씨로서는 아이슬란드 영화는 처음이었다.

얼음에 뒤덮인 자연이 이색적이었다.

바이킹으로 대표되는 야만의 힘이 느껴졌다.

비디오방을 나선게 저녁 6시.

어슴프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저녁을 먹고나니 7시반.

설에 부모님 드릴 선물을 사러 나선다.

아내가 아이디어를 하나 낸다.

부모님 선물을 비디오로 하자는 것이다.

기발한 생각으로 그를 놀래주는 아내였다.

교보문고에 도착한 그는 살만한게 뭐가 있나 살펴본다.

"현대병, 알면 이긴다" "생로병사의 비밀" "레드베터 골프레슨" "마당놀이
황진이"가 눈에 띈다.

"현대병, 알면 이긴다"는 MBC가 위암 심장병 당뇨병등 대표적인 현대병과
그 예방법을 담아 만든 비디오라는데 가격이 너무 비싼게 탈이었다.

모두 10권인데 권당 2만8,000원이나 하다니.

"생로병사의 비밀"은 KBS가 장수하는 비결을 소개한 비디오.

5권 1세트에 10만원.

"레드베터 골프레슨"은 골프를 좋아하는 구보씨 장인에게 어울릴 비디오로
보였다.

장인은 아직까지 80타 대열에 들지 못하는 수준이라는데 이 비디오가
도움이 될것 같다.

스타맥스.

5권 1세트 10만원.

"마당놀이 황진이"는 TV에서 자주 방영되는 해학극으로 2만원이었다.

SKC.

뭘 살까 한참 의논했으나 결론은 못내렸다.

내일 다시 나와 보기로 했다.

지금쯤 자고 있을 아들녀석 영어학습 테이프 하나 사서 집으로 향한다.

찬 겨울바람이 상큼하다.

달이 이지러지고 있다.

집에 다다를 무렵 담배가게 간다는 핑계로 아내몰래 야한 영화 하나 빌린다.

구보씨의 1일 비디오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박준동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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