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을 시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 잠시나마 삶의 어지러움과 삭막함을 잊고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해줄 시집 4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시인 민영씨의 "유사를 바라보며"와 강은교씨의 "어느 별에서의 하루",
김정환씨의 "순금의 기억", 함민복씨의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 비평사 간)가 그것.

이들의 시는 연령과 시세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정겹고도
따뜻한 시선을 담고 있다.

민영씨의 6번째 시집 "유사를 바라보며"에는 마음속의 "무릉"을
찾아가는 시인의 여정이 절제된 시어로 형상화돼 있다.

"지도에도 없는 꽃밭"을 향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을 믿는 구도자의
자세와 고향 철원에서의 유년시절, 미국 여행중 만난 인디언들의 애환
등이 정감있게 그려져 있다.

강은교씨는 "어느 별에서의 하루"에서 생명의 위기와 자본주의의
그늘 등 현대사회의 모순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허무와 고독의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이번 시집에서 일상속으로
한걸음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거나 "들리는 것을 들리지
않게" 하는 진리를 일깨운다.

김정환씨의 "순금의 기억"에는 문명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성찰이
드러나 있다.

그는 "잿빛 희망" "삶은 계란과 김밥" "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공허"
"군중, 유령으로 화하다" "세기말의 절벽" 등을 통해 이 시대가 벼랑끝이
아니라 다음 세기에 대한 희망적 탐색과정이라는 것과 진정한 인간회복의
길은 자기성찰에 달려있음을 나직하게 들려준다.

함민복씨는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서 컴퓨터세대의 가벼운
글쓰기와 달리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들을 선보이고 있다.

설렁탕집에서 고깃국물을 덜어주는 가난한 어머니를 생각하며 땀인양
눈물을 훔치는 아들의 모습을 그린 "눈물은 왜 짠가" 등을 통해 어머니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 고단한 도시생활의 아픔을 애잔하게 풀어내고
있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