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경량화"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은 가운데 삶의 의미를
깊이있게 탐색한 소설집 3권이 한꺼번에 출간돼 눈길을 끌고 있다.

성석제씨(36)의 창작집 "새가 되었네" (강 간)와 전경린씨(34)의
첫소설집 "염소를 모는 여자" (문학동네 간), 김환씨(35)의 장편
"세상에서 가장 지겨운 일" (문학과지성사 간)이 화제작.

이들 작품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면서
진지한 세상읽는법을 제시한다.

현실의 구석진 곳을 찾아 밝혀내는 솜씨와 함께 이들의 참신한 상상력과
개성적인 어법은 90년대 한국소설의 새로운 출구를 여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석제씨의 "새가 되었네"는 지난해 이상문학상 우수작에 선정된
첫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와 "금과 은의 왈츠"등 7편의 중.단편을
담고 있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차를 타고 가다 다리난간을 들이받고
추락하는 한 건달의 마지막 순간을 슬로비디오에 담듯 묘사한 작품.

눈깜짝할 정도의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의 전생애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며
기억의 언어로 재생된다.

군더더기없이 빠르게 이어지는 문장은 죽음에 이르는 "긴 시간"의
틈새를 오가며 묘한 리듬으로 살아 움직인다.

작가는 표제작에서 컴퓨터부품업체를 운영하다 부도를 내고 새처럼
아파트에서 떨어져 내리는 한 사내의 운명을 칼날같은 감각으로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그녀를 만나러 가겠네, 서른살이 되면."으로 시작되는
"황금의 나날"에서는 소년기에 품었던 사랑의 감정을 시적인 운율에
담아 아름답게 풀어놓는다.

전경린씨의 "염소를 모는 여자"에는 95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작
"사막의 달"과 미발표작 "봄 피안" 등 8편이 실려 있다.

30대초반 가정주부를 주인공으로 한 그의 작품들은 결혼과 사랑의
의미탐색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표제작은 "일주일 내내 새벽 세시 네시가 되도록 비디오만 보는
"남편과 살고 있는 여성의 소외되고 혼돈스런 삶을 염소의 이미지를
통해 뛰어나게 묘사한 작품.

일상에 순치되기를 거부하는 여성과 숲으로 가고 싶어하는 염소, 잠시
친분을 나눈 청년의 박쥐우산을 쓰고 염소를 몰며 비바람치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주부의 이미지가 몇폭의 유화를 겹쳐놓은 것처럼
그려져 있다.

"사막의 달"에는 종의 신분이었던 남자를 사랑한 여자, 사촌동생과의
근친상간에 휘말린 여인등 "산 하나가 풀렸다가 맺히기는 차라리 쉬울"
만큼의 긴 세월을 죄의식으로 견뎌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이 짙게 배어
있다.

김환씨의 "세상에서 가장 지겨운 일"은 집단의 무의식적 폭력앞에
희생된 한 여인의 비극을 그린 장편.

속도감있는 문체가 돋보인다.

부잣집 아들과 사랑의 도피를 떠났던 여인이 몇달동안의 동거를
끝으로 다시 시골로 끌려내려왔다가 방화사건에 휩쓸려 끝내 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죽으면 새가 된다"고 믿었던 그녀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고,
무성한 소문만 꼬리를 문다.

작가는 이를 취재하러 간 잡지사기자의 눈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
모르는 것에 대한 폭력"과 선악의 양면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