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흐르는 물빛에서도 바람을 본다.

삶의 깊이와 내면공간이 깊고 넓을수록 그 눈빛은 따뜻하다.

시인 김후란씨(61)의 일곱번째시집 "우수의 바람"(시와시학사간)은
사랑과 미움 쓸쓸함 고통 허무의 흔적까지를 감싸안는 "따뜻한 바람"
으로 가득하다.

김씨는 이 시집에서 흔들리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삶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과 좀더 나은 세상을 향한 사랑의 해법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시는 가장 적은 말로써 가장 큰 세계를 열어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풀한포기 돌하나에도 생명이 있음을 인정하고 내삶이 소중한 것처럼
모든 생명체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문학이지요"

등단 35년이 넘었지만 김씨는 아직도 문학소녀시절의 "내 책상위의
천사"를 잊지 않는다.

"천사"는 외로운 습작기동안 시를 통해 이슬이 진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햇빛이 닿으면 스러져버리는 유한성의 물방울을 무한한 생명의 보석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시인의 일임을 깨우쳐준 것이다.

"바람은 우리 삶에 생명감을 주는 깃폭인가 하면 쓰러지며 다시
일어나는 희망의 나부낌이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김씨는 살아가면서
자칫 잊기쉬운 세상의 상처들을 돌아본다.

"어제는 많은 걸 잃었네/폭풍으로 다 잃었네/./비 개여 햇살 눈부신
날/부드러운 바람이 흐르는 /이 시간에/차거이 돌아섰던/매운 눈길만큼/
가슴아픈 이별의/상처가 너무 깊네"(상처)

그의 시가 가닿는 곳은 사랑이다.

"나무그늘에서 잠을 잔 새들이 나뭇잎 향기로 젖어있는" 그곳의
평화로움도 "언젠가는 바람이 되어" 실려온다.

바람의 이미지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것은 우주의 모습을 상징하는 동시에 정신세계의 둥근고리를 보여준다.

"삶이 지루해질 때쯤 되면 다음세대들이 주는 기쁨이 찾아와 생에
활력을 불어넣고 거기에서 인생의 새봄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혼한 아들내외가 손자들을 데리고 찾아와 모처럼 함께 시내나들이에
나서는 모습이 정겹게 그려진 시 "세월"에서도 김씨의 "따뜻한 바람"은
계속 이어진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형체로부터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힘을 배우면서 지친 일상에도 샘물같은 청량감을 주는 시인으로 남고
싶다"는 김씨는 화가와 음악가가 매일 화필과 악기를 잡지 않으면 손이
굳듯 시인도 날마다 시를 읽고 써야 살아있는 가슴을 갖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얼마전 손목을 다치는 바람에 펜을 쓰기가 불편해 컴퓨터를 배우고
있다고.

문학이 날로 가벼워지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요즘 김씨의 시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자세가 어떤 모습인지를 재음미하게 한다.

< 고두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