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 풀무원 김치박물관, 연구실장 >

"어느새 김장철이구나.올해에는 몇 포기나 해야하려나"

TV 김장철 정보프로를 보다가 혼자말처럼 하시는 어머니께 "아직도
집에서 김치를 담가 드십니까?"라는 김치회사 광고도 못보셨어요?
힘들게 왜 담그려 하세요.사서드시면 편할텐데" 했다가 힐책을 들었다.

김장은 집안의 반 농사라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편하려고만 해서 야단이다.

김치박물관에서 근무하는 너까지 그런 소릴 해서야 되겠느냐는 말씀이었다.

전통음식을 연구하시는 은사님 추천으로 김치박물관과 인연을 맺어
근무한지 7개월남짓.여느해보다 김치와 관련된 일들이 많아 공적인
사명감과 그에 못미치는 나의 모자람에 어깨가 무거웠던 지난 몇달간이
생각난다.

"일본의 김치 규격화 신청" "기무치가 김치 위협" 등의 매스컴 보도가
도화선이 되어 언론계 학계 산업계를 더욱 분발시켰던 일이 지난 5월말.
사방에서 걸려오는 전화로 당황했고,매스컴에서의 촬영의뢰,인터뷰의
뢰로 짧은 지식이었기에 바쁘기만 했다.

"주한 대사 부부 초청 김치담그기 대회" "김장 모습 재현 촬영" "김장김치
담그는 법 강의" 등으로 나의 김장철은 9월로 앞당겨 다가왔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곡물을 비롯한 채소식을 해왔고 채소가 재배되지
않았던 겨울을 대비하여 채소절임음식이 발달하였다.

또 고추의 전래로 요즈음과 같은 김치가 생겨나면서 지방에 따라
사계절 다른 채소및 젓갈 양념류로 담근 1백여가지 이상의 김치가
개발됐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지방의 향토김치,우리집의 별미김치로
고집하여 지켜지던 개성적인 맛이 인구의 도시 집중,교통및 매스컴의
발달로 인해 어디서나 비슷하게 맛볼수 있는 일반적인 맛으로 변해버렸다.

경제의 성장,산업구조의 변화,핵가족화에 따라 주부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식생활에 있어서도 전통요리법에 의한 음식보다 간편하게
구입하고 조리해 먹을수 있는 즉석식품및 공장제조판매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장류는 물론 김치를 못담그는 젊은 주부들이 늘어가고,김치
못먹는 아이들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현상을 그저 시대의 탓이려니하고
돌리기에는 우리의 전통음식이 너무도 훌륭하다.

이웃 일본의 김치에 대한 관심은 종주국인 우리보다 세계시장 진출을
앞장서게 했고 김치의 국제화에 일익을 담당하게 했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에서는 김치를 일본의 음식으로
알고있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쉽게 보고 먹을수 있는 것이 김치라고 생각,소홀히
여기고 있는 동안 일본이 먼저 김치의 세계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얼마전 일본에서의 일이다.

한국인 유학생들이 마늘 냄새때문에 김치를 안먹는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하던 어떤 일본인학생이 자기는 먹을수록 맛있는 한국의 김치가
좋아서 집에서도 즐겨먹고 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입맛은 길들여지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서양음식에 길들여지고 있는 동안 일본 젊은이들은
서양음식과 함께 김치에 길들여지고 있다.

언젠가는 길들여진 입맛으로 김치는 자기네음식이라고 주장할 것이
아닌가 겁이 난다.

유행어처럼 되어버린 "김치의 국제화".자라나는 아이들이 김치를
멀리하는 상황에서라면 과연 이룩할수 있을까.

배추보다 김치판매를 부추기는 사회속에서 과연 이뤄질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김경미 (풀무원 김치박물관 연구실장)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