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매국의 취체원이 마을에 출장나와 담배입을 수색했다. 발각된자는
벌금 5원이상인데 혹은 10원 또는 20원으로 처리되는자도 있다"(1926년
11월 21일)

"봇물 문제로 오미동과 하죽 두동네사람 천명이 어울려 싸워 면장및
순사들이 나와서야 겨우 말렸다"(1922년 5월26일)

"황충이 극심하다. 대개 벼를 먹으면 황,싹을 먹으면 모적이라고 하는
것인데 서양기름(석유)으로 벼를 씻어냈다"(1902년 7월11일)

"고용할 머슴이 귀하다. 상일꾼은 논 3-4마지기와 3계절 의복외에 수십냥을
주어야 하지만 이로써도 여의치않다"(1920년 1월4일)

구한말인 1890년부터 일제치하 1944년까지 50여년간 전라남도 구례지방
오미동에 살았던 류씨 가문이 3대에 걸쳐 작성한 생활기록부에서 발췌한
부분들이다.

당시 시대상과 농촌사회를 완벽하게 복원할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는
류씨일기는 양미책, 당용록, 호역기, 농가일기, 토지수봉기등 10여권으로
류제양(조부,1846-1922)과 흥업(손자,1896-1944) 두사람이 기록한 것들.

한글로 번역한 결과 10권, 4천쪽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가 됐다.

농촌경제 연구원의 이두순, 박석두연구팀은 지난4년간 이들일기를 재정리
하고 평가한 연구결과중 농업관련 부분을 요약해 5일 발표했다.

농촌경제 연구원은 이날 발표한 부분외에도 당시 중농규모 농가의 소비지출
구조, 토지소유구조의 변화, 오미동의 사회조직등 관련 분야를 추가로
연구해 일제하 농촌과 농업상을 완전히 복원할 계획이다.

연구결과를 발표한 이두순박사는 연구결과 이 류씨집안은 당초 20만평의
농지를 경영하던 대지주였으나 일기가 시작된 19세기말에는 2만평정도의
중농규모로 축소됐고 일기가 끝나는 싯점에는 8천평정도의 농사를 지었다고
분석했다.

경영규모 축소는 주로 분가와 상속외에도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소비지출
이 과다해진 점때문이라고 이박사는 설명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류씨집안은 1913년부터 일본에서 들여온 벼품종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30년대 들어서는 화학비료를 쓰기 시작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노비제도는 일제말까지 지속됐고 머슴, 협호(동거인), 임노동이 일제하
노동력의 원천으로 매년 2백-4백명의 노동력이 농삿일에 투입된 것으로
조사됐다.

류씨일기에 따르면 일제가 들어오면서 잠업이 장려된 반면 술제조가 금지
됐고 담배가 전매사업이 되면서 엄격한 단속이 뒤따라 류씨 역시 상당한
벌금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일제의 화폐개혁에도 불구하고 상평통보등 구화폐가 지방에서는 계속
통용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박사는 "노비를 시집보낼때 준비해 주었던 혼수물목과 잔치상보던 전말
까지 이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하동 평사리를 무대로
"토지"를 썼던 박경리씨가 이 일기를 보았다면 소설의 내용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