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황해도의 민요와 잡가를 통칭해 서도소리라고 부른다.

서도소리에는 씩씩한 기상과 한맺힌 수심이라는 두 가지 정서가
담겨있다.

대륙에 인접해 한반도의 방패막이 구실을 했던 꿋꿋한 역사가 남아있고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이 더해져있다.

본고장 북한에서도 명맥이 끊어졌다고 전해지는 서도소리.

오복녀씨(80.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예능보유자)는 외롭게
서도소리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이다.

"실향민의 음악이라고들 하지요. 고향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도소리
의 팬이었지요. 세월따라 사라지는 분들이 늘고 있어요"

지역연고가 적어 공연이 있어도 후원이나 지원 협찬을 얻기 어렵다. 민속
예술단의 해외공연 때도 제대로 끼이지 못한다.

오씨가 출강하던 중앙대에만 전공자들이 드문드문 있다가 그나마 요즘엔
없어졌다. 국악중에서도 "최고비인기종목"이 서도소리다.

오씨는 어린시절 익힌 고향의 소리와 국악을 30년가까이 잊고 살다가
이순이 다돼 되찾은 보기드문 인생행로를 걸어온 국악인이다.

"평양 서문고녀에 다니던 16살때였지요. 동네 언니네 집에 갔다가 사랑방
에서 흘러나오는 서도소리에 반했지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당시 젊은
명창 장금화씨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든 한 번 들으면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 장기였던 오씨는 타고난
목소리와 남다른 기억력을 발휘해 3년을 배워야 제대로 한다는 "관산융마"
와 "수심가" 등 서도소리 50여곡을 1년만에 마스터했다.

17살때 서울로 이사한 후에는 제일고녀(경기여고전신)에 다니면서 조선
권번의 정학기씨에게 가곡을 배워 다양한 발성법을 터득했다.

궁중무용의 하유일, 경기잡가의 주수봉 양금의 김상순, 가야금의 정남희
씨 등이 그시절 오씨의 스승이었다.

서른살무렵 오씨는 남편 유종후씨를 따라 평양으로 돌아갔다가 광복후
서울에 와 5년후 6.25를 만났다. 남편은 납북되고 폭격에 남매를 잃었다.

40여년이 지났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1.4후퇴때 대구로 내려가 17년을 살았지요. 하나 남은 큰아이 뒷바라지
만 했어요. 이물장수 날품팔이 등 안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 시절 삶의 무게에 눌려 "소리"는 생각도 못했다는 오씨. 67년 대학을
마친 장남이 군에 입대하자 오씨는 54세의 나이로 상경한다.

그가 잊고 살던 서도소리를 다시 찾은 것도 그때다. 서도소리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옛친구 김정연씨(87년작고)를 만나고부터였다.

장학선선생(70년작고)과 김정연씨외에는 서도소리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을 알고 오씨는 본격적으로 서도소리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국민요연구회 서도소리보존회등과 연계해 서도소리 보급사업을 벌이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도 꾸준히 참가했다.

70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장선생이 사망하자 71년 오씨는 김씨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서도소리예능보유자로 지정받는다.

"서도소리의 목쓰는 법은 독특하지요. 판소리 남도민요가 쉰듯한 깨지는
소리를 장기로 알고 경기민요가 고운 목을 쓰는데 반해 서도소리는 감정
의 폭이 넓어 발성법이 다양하지요"

특히 애조에 많이 쓰이는 "눌러 떨어뜨리는" 반음은 범재의 경우 10년이
걸려야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만큼 어렵고 그래서 시작하는 사람도 적지만 발을 들여놓았다가도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오씨의 제자도 그래서 열손가락이면 다 세고 만다.

오씨는 지난 78년 목쓰는 요령 42가지를 정리하고 독특한 12선보를
고안, "수심가" "영변가" "긴아리" 등 50여곡의 서도소리 전체를 채보해
1백80쪽짜리 책자 "서도소리"를 엮어냈다.

음반취입에도 힘을 기울여 "서도소리대전집"(성음사) "서도시창,수심가,
엮음수심가"(성음사) "전통서도소리"(아세아레코드) 등을 만들었다.

연초 녹음을 마친 "서도소리전집"이 이달중 서울음반에서 5장짜리 CD로
출간된다. 90년 남북문화예술단 교류 때 평양에도 다녀왔다.

고향은 변했고 서도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 오씨의 회고. "예부터
서도소리는 대동강물을 마셔야 제대로 된다고 했지요. 내 인생에서 다시
그런 날이 올는지. 제자들을 부지런히 길러야지요. 그들이 능라도에서
서도 동포들에게 끊긴 소리의 맥을 전할 기회가 오겠지요"

80의 나이에도 낭랑한 목소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오명창. 장구를
둘러메고 반주하며 부르는 입창도 자주한다.

연초 대학로에 문을 연 "서도소리보존회"연습실에 1주일에 한번씩은 꼭
나간다. 역삼동 진달래아파트에서 대학로는 그에게 아주 가까운 거리다.

<권녕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