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논란 속에도 한국과 일본의 경색된 관계가 풀려가는 모양새입니다. 경제 협력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일본, 국내 스타트업엔 미국과 함께 공략 대상 1순위로 꼽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 10년 이상 창업 활동을 하고, 현지 엑시트(투자 회수)에 성공했던 메타버스 플랫폼 스타트업의 정세형 대표가 일본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글을 한경 긱스(Geeks)에 보내왔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일본 진출을 위해선 “제품은 바꾸지 말되, ‘사업화 과정’을 현지화하라”고 조언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기회의 땅…10년 전부터 SaaS 전환한 일본

일본은 기회의 땅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기회의 땅이다. 하지만 내국인을 위한 기회다. 내국인은 국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고 일본을 디지털 선진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누구나 내국인이 될 수 있다. “아직도 도장을 사용하고, 팩스를 사용하며 페이퍼워크에서 벗어나지 못한 디지털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외국인의 이미지다.

일본은 폐쇄적인 이미지가 있어 외국인이 차별받는다는 인상도 받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2011년 일본에 와서 10년 이상 사업을 하며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은 없었다. 오히려 내국인보다 많은 면에서 혜택을 받았다. 외국인인데 일본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고도성장에는 항상 외국과의 교류가 있었다. 외국인은 혁신적이고 진취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보인다. 외국 서비스라고 배척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현지화만 잘돼 있으면, 일본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아마존웹서비스(AWS), 세일즈포스, 슬랙, 줌이 그랬다. 현지에서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가 있음에도 성과를 냈다. 한국보다 외국인에게 열린 시장으로 느껴진다.
일본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시장 성장세. /리서치네스터 제공
일본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시장 성장세. /리서치네스터 제공
반면 한국에서 일본은 디지털 후진국으로 표현된다. 이는 절대적인 수로 봤을 때 일본에는 경제를 지탱하는 중소기업이 많고, 이들의 고령화로 디지털화가 늦어져서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소위 ‘잘나가는 기업’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보기술(IT) 투자를 진행했다. 사내 전산망을 구축해 디지털화를 이뤘고, 10년 전부터는 벌써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로의 전환도 이루었다. 최근에는 그 범위가 제조업 등 다방면으로 퍼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인공지능(AI)의 활용도 늘고 있다.

이는 SaaS 기업에 대한 투자액에도 나타나는데 2010년 30억엔(약 295억원) 언저리의 연간 투자액이 2021년에는 1465억엔(약 1조4413억원)까지 늘었다. 최근 스타트업 혹한기로 규모는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2010년 전후 설립된 일본 내 SaaS 1세대가 1000억엔(약 9800억원)이 넘는 기업가치로 상장돼 거액의 투자 회수가 발생했다. 그 이익은 다시 SaaS에 재투자되는 등 ‘SaaS 붐’은 아직도 지속 중이다. 그만큼 SaaS 시장은 커지고 있고 이는 확실히 일본이 기회의 땅이라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돈이 돈다"…자생 시작한 日 SaaS 투자

SaaS의 정석은 중견·중소기업(SMB)부터 제품주도성장(Product Led Growth·PLG)을 통하여 차근차근 고객층을 구축한 다음, 세일즈 리드(SLG, Sales Led Growth)와 업셀링(기존 고객 공략)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 일본의 SaaS 1세대라 불리는 명함관리 SaaS 업체 ‘산산(Sansan)’, 회계 SaaS 업체 ‘프리(freee)’ ‘머니포워드(MoneyForward)’, 고객관리 SaaS 업체 ‘프레이드(Plaid)’, 앱 구축 SaaS 업체 ‘야플리(Yappli)’ 등도 이러한 정석을 통하여 상장했다. 하지만 2020년 들어서 SaaS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노하우가 구축되면서, 일본에 현지화 되어 단기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SaaS의 ‘새로운 정석’이 성립되고 있다.

순서는 △‘니치 세그먼트’의 초기 SaaS를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이 적극적으로 이용 △대기업 레퍼런스를 이용하여 SLG로 다른 대기업으로의 착륙 △대기업 그룹에 대한 확장 △대규모 투자 유치를 통한 브랜딩 및 독점 구축 △제품 라인업 확장 및 독점시장을 통한 SMB GTM(Go To Market) 등이다.

일본은 섬나라의 특징인지 시장이 커서인지, 한국처럼 대기업이 스타트업이 발굴한 시장에 진출하여 스타트업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 협업하며 같이 성장하는 것을 도모하는 형태가 많다. 대기업이 스타트업과 인연을 맺어 새로운 트렌드를 빠르게 잡아내거나, 연계하여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드는 방식 등으로 기존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인다. 따라서 경쟁사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초기 스타트업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프로덕트가 우수하다면 전면 도입에도 적극적이다. 또한 이는 투자를 전제로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초기 프로덕트가 대기업에 도입되면서 다른 대기업에도 접근하기 쉬워지는데, 투자사 등의 소개를 통하여 초반부터 대기업 GTM이 가능해진다.

중소기업이 많은 만큼 대기업 그룹도 한국보다 많은데, 프로덕트가 궤도에 오르며 이들 그룹에 확장이 이루어지면 대개 수십억엔의 대규모 투자를 받게 된다. 본래 이 정도의 투자는 해외투자자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SaaS 시장이 커지며 상황이 달라졌다. 1세대 SaaS 투자비 회수를 통하여 펀드 규모가 커지고, 일본 국내 투자자만으로 수십억엔의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늘면서 허들이 낮아졌다.

이러한 투자를 바탕으로 택시 광고, 텔레비전 광고 등을 통한 대규모 브랜딩 마케팅을 집행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 오면 대개 투자사도 동일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투자를 꺼리면서 독점시장이 구축된다. 또한 대규모 광고는 스타트업 서비스를 도입하기 꺼리는 보수적인 대기업에도 안정적인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자연스럽게 대기업과의 이용 및 협업(프로덕트 연동 및 대리점)도 많아지며, 초기 시장에서 벗어나 프로덕트 라인업을 확장하고 PLG를 통하여 SMB의 이용도 늘어난다.

동일 제품으로 ‘가치 제안’ 현지화 필요

일본 진출을 위하여 프로덕트를 ‘하드포킹(Hard forking)’할 필요는 없다. 일본 진출을 한다는 것은 국내시장에서 어느 정도 점유율을 가지고 있고, 초기 SaaS 프로덕트는 아닐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줌과 노션이 좋은 벤치마킹이 될 것이다.

줌이 일본에 지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SLG 체제를 구축한 것은 2018년 7월이다. 2019년까지만 해도 일반인은 알지 못하는 서비스였다. 웹엑스의 경쟁 서비스로 시스코와 다르게 비디오 콘퍼런스를 주요 제품으로 일부 대기업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 이후론 그 대기업이 레퍼런스가 되어 SLG 팀이 폭발적으로 다른 대기업에 일감을 따냈다. 비디오 콘퍼런스의 특징상 대기업 그룹에 대한 확장도 원활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소프트뱅크를 필두로 대리점 계약을 통해 대규모 마케팅 없이도 사기업, 정부, 학교 구분 없이 일본 곳곳에 퍼져나갔다. 현재는 줌 룸 등 라인업 확장을 통한 업셀링을 진행 중이고, 디지털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SMB에서도 줌을 이용할 정도로 SMB에 대한 GTM도 이루어졌다.

노션이 일본에 지사를 설립한 것이 2022년 6월인데, 2020년쯤 크리에이티브 직군의 얼리어답터가 이용하기 시작했다. 2021년 11월부터는 일본어가 도입되면서 급격히 사용자가 증가하였다. 2022년에 들어서는 대기업에서 노션을 이용하는 사례도 자주 나타났다. 그 해 후반엔 대규모 브랜딩 광고가 집행됐다. 소규모 SLG 팀을 운용하면서 PLG에 집중한 것은 줌과의 차이점이다. 지금의 스타트업 혹한기에 있어서는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어 향방이 궁금할 정도다.

이외에도 피그마, 미로, 가깝게는 한국의 채널톡처럼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에서 포지셔닝에 성공한 비(非)일본산 서비스들이 있다. 일본 현지 대리점을 통해 알음알음 이용되고 있는 서비스들도 있다. 물론 일본 현지 서비스보다는 그 숫자는 현저히 적지만 꾸준히 이러한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일본에 기회가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단 이들의 공통점은 프로덕트는 같아도 언어만이 아닌 사업화 과정(business process)과 가치 제안(value proposition)을 현지화했단 것이다. 해외 진출 자체는 당연히 어렵다. 하지만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합한 인재를 배치하면, 성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韓 스타트업, 일본 진출 노린다면…'노션'과 '줌' 배워라 [긱스]
정세형 오비스 대표
△일본 교토 공예섬유 대학
△채용 플랫폼 ‘HR데이터뱅크' 창업(일본 HR기업 윌그룹에 매각)
△니마루(NIMARU) 테크놀로지 창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