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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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이 원격으로 재배한 파프리카, 로봇이 색상을 보고 익은 정도를 분석해 직접 수확한 딸기, 모듈형 수직농장에서 자라는 의료용 대마….

그동안 저부가가치 산업으로 여겨왔던 농업에 혁신 바람이 불고 있다. 첨단기술로 무장한 스타트업이 AI와 로봇, 사물인터넷(IoT) 등을 적용해 농업 생산성을 크게 높이면서다. 다양한 분야의 대기업도 주요 농업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애그리테크(농업+기술)’ 시장에 뛰어들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중동 등 해외에 진출하는 스타트업도 등장하고 있다.

농장 바꾸는 새로운 기술들

 그래픽=이은현 기자
그래픽=이은현 기자
22일 농업 솔루션 스타트업인 아이오크롭스가 운영하는 경남 밀양의 파프리카 농장. 1만1200㎡(약 3400평) 규모의 온실엔 농사 경험이 없는 현장 관리직원 1~2명만 일한다. 실제 농사와 관련된 주요 결정은 서울에 있는 전문 재배사가 한다. AI 기술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활용, 원격으로 농사를 짓는 방식이다. 농장에 설치된 카메라로 잎의 면적, 과실 개수, 줄기 굵기 등을 파악해 생산량을 예측하고 필요한 솔루션을 곧바로 적용하는 게 핵심이다.

이 AI 재배 온실은 주변의 다른 온실보다 면적당 파프리카 생산량이 30%, 양품 비율은 20% 높다. 조진형 아이오크롭스 대표는 “더 정확한 모니터링을 위한 주행 로봇을 곧 도입할 예정”이라며 “장기적으로는 수확 같은 농작업 부문까지 완전 자동화가 될 것으로 본다”고 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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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기반 농업 스타트업인 조르디는 지난 15일 홍성군과 충남 홍성의 딸기 농가에 AI와 로보틱스 기술을 적용하는 연구개발 협약을 맺었다. 조르디의 농업 로봇은 여러 방향에서 과일의 색과 크기, 잎의 모양 등을 확인하고 작물이 얼마나 익었는지 판단해 로봇 팔을 뻗어 직접 수확한다. 지난해 조르디 본사의 로봇 기반 온실에서 시험 재배된 딸기가 미국 시장에서 판매됐다.

에이아이에스는 하우스가 아니라 노지(맨땅)에서 자라는 작물의 생산량을 높이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작물의 품종, 토질, 기후 조건 등을 분석해 최적의 재배 방식을 농부에게 제안한다. 에이아이에스 솔루션을 통해 재배된 감자와 콩의 생산량은 각각 23%와 28% 늘었다.

중동에서 채소 키우는 韓 스타트업

기존 농장에 첨단기술을 접목하는 방식을 넘어 인공 빛과 자동급수 장치를 활용하는 ‘밀폐형 스마트팜’을 운영하는 스타트업도 있다. 컨테이너 모양의 모듈형 수직 농장을 개발한 엔씽은 2020년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실증사업을 한 데 이어 지난해 UAE의 종합 유통그룹 사리야와 200만달러(약 25억원)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엔씽은 컨테이너 농장 내부에 LED(발광다이오드)를 설치하고 일조량은 물론 물과 비료 등을 제어할 수 있도록 했다. 날씨와 상관없이 작물을 재배할 수 있어 사막이 많은 중동 국가의 관심이 높다. 김혜연 엔씽 대표는 “전 세계의 안정적인 먹거리 공급에 기여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에어로포닉스(뿌리를 물·흙에 담그지 않고 드러낸 채 양액을 흩뿌려 재배하는 방식) 스마트팜 스타트업인 올레팜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식품 제조 유통업체인 파이드와 스마트팜 사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모듈형 스마트팜 기술을 적용해 사우디에서 딸기를 재배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내용이다. 국내 최대 스마트팜 기업인 팜에이트의 자회사 플랜티팜은 발전설비 시스템 기업인 포미트와 컨소시엄을 이뤄 쿠웨이트 스마트팜 사업 계약을 따냈다.

쑥쑥 크는 스마트팜 시장

기후 변화와 병해충 문제로 농업 환경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일은 세계적 과제다. 혁신 기술을 적용한 스마트팜과 환경 제어가 가능한 수직농장 솔루션을 개발한 스타트업이 주목받는 이유다. 농식품 투자 플랫폼 애그펀더에 따르면 농업·푸드테크 관련 글로벌 투자액은 2020년 261억달러(약 32조원)에서 2021년 517억달러(약 63조원)로 불었다.

농업 인구의 고령화와 경작지 감소 추세는 식량 자급률이 낮은 한국(자급률 44.4%) 같은 나라에 더욱 치명적이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하우스 원격제어 단계에 오래 머무르고 있었던 국내 스마트팜에 AI와 로봇 기술이 적용되면서 새로운 성과가 나오고 있다”며 “몇 년 안에 한국인 누구나 쉽게 로봇이 수확한 과일을 먹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과학기술일자리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스마트팜 시장 규모는 2019년 3조6000억원에서 2024년 5조4000억원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주요 국내 식품·유통 대기업은 농업 스타트업에 발 빠르게 투자하고 있다. 이마트는 2020년 엔씽에 5억원가량을 투자했다. 경기 이천에 연 100t 수준의 채소를 생산할 수 있는 컨테이너 스마트팜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스마트팜 솔루션 스타트업 퍼밋, 특수작물 재배 스타트업 그린 등에 투자했다.

해외 빅테크 역시 농업 스타트업에 투자하거나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클라우드로 디지털 농업을 지원하는 서비스를 출시해 농장 설비와 네트워크 장비를 연결하는 데 드는 비용을 5분의 1 수준으로 낮췄다. AI 작물관리 솔루션 회사인 탐베로닷컴(아르헨티나), 농업용 드론 공유 플랫폼인 팜프렌드(중국) 등에도 투자했다. 구글은 사과 수확용 로봇을 개발한 어번던트로보틱스(미국)와 농업 데이터를 분석하는 파머스비즈니스네트워크(미국) 등에 돈을 넣었다.

한국에서도 잘 통할까

다만 소형 농가, 노지 재배 중심인 한국의 농업 환경을 고려했을 때 AI와 로보틱스 등 첨단기술을 적용한 농업 솔루션이 실제 ‘가성비’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란 관측도 있다. 대형 농가가 많은 미국이나 시설 농업이 발전한 이스라엘 등과 비교했을 때 비싼 시설과 솔루션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농가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가 보조금으로 떠받치거나 자본력이 있는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대기업의 농업 진입에 대한 농민들의 거부감이 크다. 2016년 LG CNS가 이른바 ‘과학농업’을 하겠다며 새만금 산업단지에 대규모 스마트팜 단지를 조성하려고 했다가 농민단체 반대로 사업을 포기한 사례도 있다.

세계적으로 투자 경기가 위축된 상황에서 단기 수익을 내기 어려운 농업 분야 스타트업이 타격을 받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기술 중심 농업 스타트업은 연구개발(R&D)을 거쳐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기까지 최소 수년이 걸리는 게 보통이다. 한 벤처캐피털(VC) 관계자는 “농업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의 적정 수준을 잘 판단해 상용화에 성공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