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까지 오는 흰색 로봇이 아파트 단지를 주행한다. 육면체 모양 흰 박스에는 편의점 음식을 담는다. 구멍이 뚫린 검은색 바퀴 4개는 장치의 핵심이다. 이리저리 모양이 찌그러지면서도 로봇 몸체를 계단에 척척 올려낸다. 현대자동차 사내벤처 모빈의 배달 로봇은 장애물을 인식하고 회피하는 데 집중하는 다른 로봇과는 구동 목표가 다르다. 지난 17일 제주에서 열린 한경 긱스의 스타트업 경진대회 '긱스 쇼업'에서 공동 2위에 오른 모빈의 최진 대표를 긱스가 만났다.

최 대표는 “라스트마일 배달 로봇 시장은 2030년 97조원에 달할 것”이라며 “공원형 아파트가 아닌, 일반 아파트 단지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장애물 극복 로봇을 내년 1분기에 선보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대기업 직장인'의 변신…졸업 논문이 아이템됐다

모빈은 현대차 사내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했다. 내달 법인 설립을 계획 중이지만, 이미 사업성을 인정받아 현대차로부터 13억원가량을 투자받았다. 최 대표는 중앙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현대자동차에서 엔진 및 배기 저감장치 엔지니어로 8년을 일했다. ‘내 사업’에 대한 아쉬움은 대학 재학시절부터 있었다. 최 대표는 “장애물 극복 로봇은 학부 졸업 논문 때 다뤘던 아이템”이라고 말했다. 1년간 3억원의 사업비를 지원하고, 실패해도 원래 부서로 돌아갈 수 있는 회사 지원 프로그램은 직장인이었던 그의 마음에 불을 댕겼다.

로봇 개발 과정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2020년 11월 현대차 스타트업팀에 정식 배속되기 전까지 동료 2명과 매일같이 밤을 지새웠다. 그는 “현대차 ‘H 스타트업’ 프로그램은 해마다 4월에 전사적으로 스타트업에 도전할 직원을 모집하고, 6개월간 검증을 통해 최종 선발하는 형태”라며 “팀원들이 모두 부서 업무도 해야 하기 때문에 6개월가량 퇴근 후 로봇을 개발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했다. 최 대표는 2018년 프로그램에 탈락한 이력이 있어 더욱 절실했다고 말했다.
최진 모빈 대표. /김범준 기자
최진 모빈 대표. /김범준 기자
재수 끝에 얻은 기회였지만, 로봇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수익성이 없다”는 멘토들 평가도 따랐다. 다시 6개월을 투자해 두 발 달린 로봇은 안정감을 갖춘 네 발 로봇으로 재탄생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한 KAIST와의 협업은 지능을 더했다.

김진환 KAIST 교수 연구팀의 자율주행 기술이 적용된 로봇은 장애물을 인식하고 스스로 극복해내는 판단력을 갖추게 됐다. 라이다(LiDAR)를 이용한 야간 위치추적, 장애물 진입 각도 제어, 종합 자율주행 판단 기술이 완비됐다. 올해 여름부터 현대차 내부에서도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뀐 이유다. 본격적인 법인 설립 준비에 돌입할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현재 집중하고 있는 것은 실증 사업이다. 최 대표는 우선 편의점과의 협업을 염두하고 있었다. 일반 음식 배달보다 난도가 낮고 배달 수요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내년 1분기 실증 사업을 함께할 BGF리테일은 초기 형태인 두 발 로봇 개발 때부터 모빈의 제품에 관심을 보였다. 1분기 사업이 진행될 장소는 경기 화성시 현대차 2단지 아파트다. 3주간 24시간, 서비스 기간 중 1일 25건을 목표로 총 350건의 배달을 진행할 계획이다. 내년 4분기에는 대구에서 도미노피자와 배달 서비스에도 나설 예정이다.

특허로 쌓은 기술력…"CU 편의점에 적용 확대"

모빈 로봇의 장애물 극복 성능은 높이 180㎜ 이하, 폭 260㎜ 이상 계단을 돌파할 수 있는 수준이다. 보도 경계석 높이는 250㎜ 이하면 넘어설 수 있다. 속도는 최대 6㎞/h로, 10㎏ 중량을 적재할 수 있다.

장애물 인식을 위한 고비용 센서나 제어기는 필요 없다. 국내선 로보티즈‧뉴빌리티‧우아한형제들이 4바퀴‧6바퀴 자율주행 배달 로봇을 바탕으로 시장을 선점해가고 있다. 다만 대부분이 한정된 도심이나 공원형 아파트, 대학가를 위주로 움직인다.
모빈의 자율주행 배달 로봇은 모양이 변하는 바퀴와 방향 제어 시스템을 갖추고 계단 등 장애물을 돌파할 수 있다. /모빈 제공
모빈의 자율주행 배달 로봇은 모양이 변하는 바퀴와 방향 제어 시스템을 갖추고 계단 등 장애물을 돌파할 수 있다. /모빈 제공
경쟁 업체에 장애물 극복 기술이 잠식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이유는 특허다. 최 대표는 “2년간 15개의 기술 특허를 출원했고, 경쟁사가 보유 특허를 우회하거나 다리형 로봇을 사용하는 구조는 고도의 제어기가 필요한 이유 등으로 너무 많은 자원을 요구한다”며 “모빈과 같은 형태는 해외에도 없다”고 말했다. 카메라와 GPS를 기반으로 연간 120만 건을 배달하는 미국의 스타십테크놀로지 로봇은 대학 캠퍼스 평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모빈을 가로막는 규제도 있다. 현재 국내에선 허가받은 지역 이외 자율주행 배달 로봇을 운행할 수 없다. 변화는 있다. 모빈은 지난 9월 국토교통부(국토부)가 주관하는 국가스마트도시위원회를 통해 규제 샌드박스 신청을 완료한 상태다. 국토부는 도로교통법과 보행안전법, 개인정보보호법 규제를 미뤄주기로 했다. 최 대표는 “지금 당장 국가가 모든 주행 규제를 풀어준다 하더라도 배달 로봇 생태계가 현장을 바로 바꿀 만큼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며 “완화 추세에 있는 배달 로봇 규제 속도와 로봇의 기술 고도화 속도가 비슷하게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사업을 본격화할 시기는 규제가 본격 완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2025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모빈은 편의점을 거점으로 자체 단거리 배달 플랫폼을 구축한 뒤 음식 배달로도 서비스를 확대할 계획이다. 배달 로봇 확대를 위한 거치와 충전 장소는 전국 CU 편의점 매장 1만 5600개를 대상으로 마련한다. 기존 로봇을 활용해 24시간 움직이는 자율주행 순찰 로봇도 개발할 예정이다.

최 대표는 “국내 공원형 아파트와 일반 아파트의 비율은 각각 25%와 75%”라며 “장애물 극복 로봇을 ‘2세대 배달 로봇’으로 구분 짓고, 더 넓은 시장에서 로봇 생태계를 바꿔나가겠다”고 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