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정 서울대 총장이 여학생 공학주간 강연회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미래 인재상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제공
오세정 서울대 총장이 여학생 공학주간 강연회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미래 인재상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제공
“3년 전 서울대 총장이 됐을 때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60여명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어요. 이후 여성 교수 두 명을 뽑았는데 굉장히 잘하고 계십니다.”

오세정 서울대 총장은 지난 21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걸스 엔지니어 톡(Girls’ Engineering Talk)’ 기조강연에서 “앞으로 이공계 분야에서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생길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오 총장은 “공학 분야에서 여성이 차별받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제 공학계에서도 여성 인재를 뽑으려는 곳이 늘고 있다”고 강조했다. 걸스 엔지니어 톡은 10대 여학생들의 공학 분야 진출을 독려하기 위해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이 주최한 이공계 전문가 강연 프로그램이다.

◆“여성 과학자에게 기회 많아질 것”

이날 오 총장은 자율주행 자동차를 예로 들며 산업 구조가 여성의 능력을 더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완전 자율주행차 시대가 되면 자동차 안에서 게임을 하고 영화도 볼 것”이라며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소프트웨어보다는 콘텐츠의 부가가치가 높아진다”고 전망했다. 이어 “다양한 콘텐츠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혁신적인 서비스가 더 많이 필요한데 여성의 소프트 파워가 강점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 총장은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소통과 협업의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옛날엔 과학자라고 하면 혼자 실험실에 틀어박혀서 밤새 연구하는 모습을 떠올렸는데 요즘 과학자의 생활은 전혀 다르다”며 “다른 연구자들과 공동 연구하고 협업해야 한다”고 했다. 자연스레 “과학기술인을 꿈꾼다면 소통하고 협력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조언이 이어졌다.
안혜연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이사장이 여학생 공학주간 강연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제공
안혜연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이사장이 여학생 공학주간 강연회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제공
오 총장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에 관한 논문을 혼자서 썼지만, 최근 노벨 과학상을 받는 논문은 대부분 여러 명의 과학자가 공동 저자로 참여하고, 상도 같이 받는다”고 했다. 이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남에게 설명하고 소통하면서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이제는 대학에서 4년간 공부한 지식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지적했다. 평생 공부해야 하는 평생 학습 사회가 왔다는 것이다. 오 총장은 “그중에서도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며 “금융·마케팅 등 과학과 무관해 보이던 분야에도 과학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성 과학기술인 선배들 “두려워 말고 도전하세요”

오 총장의 기조 강연이 끝나고 인공지능(AI), 환경공학, 반도체, 바이오 분야 현직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과학기술인 네 명이 강연에 나섰다. 오순영 KB국민은행 금융AI센터장은 “모든 분야에 인공지능이 접목되고 있다”며 “수학을 못 해도 인공지능을 공부할 수 있으니 미리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오 센터장은 “닷컴기업과 ‘한글과컴퓨터’를 거쳐 현재 금융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자리를 옮길 때마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고 말했다.
여학생 공학주간 강연회에 참석한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청중의 질문을 받고 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제공
여학생 공학주간 강연회에 참석한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청중의 질문을 받고 있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제공
이선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중고교 여학생들에게 적극적인 도전을 주문했다. 그는 “과학 분야에 여성이 적다는 것은 여성이 살아남기 힘든 환경 때문일 수도 있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여성이 성장할 여지가 많다고 볼 수도 있다”며 “다양성이 중요해지는 시대에 여성이 과학 분야에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책임연구원은 “과학자라고 하면 뭔가 독특하고 365일 실험실에 처박혀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만 있지는 않다”며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워라밸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의 계열사로 반도체 장비 등을 생산하는 세메스의 박완재 etch(에치)팀 수석은 반도체 산업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었다. 박 수석은 “삼성전자에 입사했을 때 반도체 부문은 야근도 많고, 화장도 할 수 없어서 특히 여자 직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며 “그러나 현재 반도체는 가장 큰 산업으로 발전했고,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반도체 제조 분야는 강하지만 장비와 부품, 소재는 외국 의존도가 높다”며 “여성 이공계 인재들이 장비, 부품, 소재 쪽에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지민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참석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제시했다. 이 교수는 “여러분은 이미 ‘최선의 DNA’를 지니고 있다”며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발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물리 화학 지구과학 등 다른 과학 분야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 다 포기하고 선택한 것이 생물학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다른 분야를 공부한 경험이 융합 연구의 바탕이 됐다”고 자신의 경험을 소개했다. 그는 “나의 비교 상대는 남이 아니고, 여성 과학자의 비교 상대는 남성 과학자가 아니다”며 “어제의 나보다 발전한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회에는 초·중·고교 여학생과 학부모, 교사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현장에서만 100여명이 참석해 자리를 꽉 채웠고, 유튜브와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900여명이 시청했다. 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은 다음달 8일까지 ‘2022 여학생 공학 주간’ 행사를 연다. 전국 5개 권역 15개 대학에서 온오프라인 공학 전공 체험과 실습, 공과대학 학과 설명회 및 연구실 견학, 여성 공학인 특강, 공학 분야 선배의 멘토링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