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은 중간요금제 압박…핵심은 경쟁 촉진
미국 1위 통신사 AT&T의 5세대(5G) 이동통신 요금제는 15종이다. 데이터 무제한은 기본, 고객은 부가 서비스와 가격만 고려하면 된다. 미국 2·3위 업체인 T모바일과 버라이즌도 다르지 않다. 5G 요금제가 많아 뭘 선택해야 할지 오래 고민해야 할 정도다.

한국은 어떨까. 국내 통신사의 5G 요금제는 5종 안팎(데이터 무제한 기준)이다. 지나치게 비싼 무제한 상품과 데이터가 턱없이 모자란 상품만 있어 정부가 통신사에 5G 요금제 추가 출시를 압박하고 있다. 첫 번째 결과물은 SK텔레콤이 제안한 월 5만9000원 요금제(24GB 제공)였다. 이 상품에 대한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시선은 차갑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의 ‘가성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압박해 상품을 다양화하는 상황 자체가 난센스라고 입을 모은다. 전파의 공공성을 무시할 수 없지만, 통신사는 엄연한 사기업이다. 기업은 매년 수조원을 투자하고 경영진은 결과에 책임을 진다. 외국인을 포함한 주주들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이런 민간 기업에 정부와 정치권이 밑지는 장사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란 지적이다.

서비스 가격은 참여자의 경쟁 속에 도출되는 결과물이다. 정부가 통신 요금을 낮추고 싶다면 시장 플레이어 간 경쟁을 촉진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통신 3사의 ‘5-3-2’ 점유율 구도에 안주하고 있는 것 같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포함한 정부의 업무계획에 ‘통신 경쟁 촉진’이란 문구는 사라진 지 오래다. 빈자리는 ‘통신비 경감’ 같은 포퓰리즘적 용어가 채우고 있다.

이런 분위기 영향인지 통신사들도 과거처럼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경쟁사를 저격하고 자사 서비스의 우위를 강조하는 통신사 광고를 찾기 어려운 건 우연이 아니다. 국내 통신사들의 ‘야성’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미국의 경쟁 상황은 한국과 다르다. AT&T, T모바일, 버라이즌은 0.1%포인트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통신사 광고를 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AT&T는 미국 지도에 자사와 T모바일의 5G 커버리지를 비교하며 대놓고 경쟁사를 저격한다. T모바일은 “AT&T와 버라이즌이 고객 요금을 인상하지만 우리는 다르다”며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다.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 혜택은 소비자에게 간다. ‘30달러’부터 시작하는 미국의 저렴한 무제한 5G 요금제는 통신사 간 치열한 경쟁의 산물이다. 시장 경제를 앞세운 윤석열 정부의 관료들이 고민해야 할 건 기업 팔 비틀기가 아니라 경쟁 촉진이다. 그 시작은 ‘중간 요금제’란 희한한 번지수로 향하고 있는 통신정책을 바로잡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