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강화에 나선 미국 인텔이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 중 가장 많은 금액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투자액 대부분을 파운드리에 집중, TSMC에 이어 글로벌 2위를 달리는 삼성전자부터 맹추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인텔, 지난해 역대 최대 152억달러 R&D 투자

10일 글로벌 시장조사회사 기관 IC인사이츠(IC insights)의 맥클린 리포트(McClean Report)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반도체 회사의 R&D 지출은 714억 달러(한화 약 91조원)로 전년 대비 13% 이상 증가했다.

가장 공격적으로 R&D에 투자한 회사는 인텔이다. 지난해 인텔은 R&D 투자에 역대 최대 규모인 152억달러(약 19조3000억원)를 쏟아 부었다. 인텔의 전년 대비 R&D 증가율이 2019년 마이너스 1%, 2020년 1%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큰 폭으로 지출을 늘린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R&D에 1년 전보다 13% 증가한 65억달러(약 8조2000억원)를 투자했다. TSMC와 경쟁 중인 5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공정 개발·양산을 위해 투자를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R&D 지출 규모로 2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인텔과의 격차는 87억달러(약 11조1000억원)에 달했다. 다시 말해 인텔의 R&D 투자가 삼성전자 투자 규모의 2배가 넘었다는 뜻이다. IC인사이츠의 2020년 조사에서 인텔이 129억달러(약 16조4000억원)를, 삼성전자가 56억달러(약 7조1000억원)를 각각 R&D 부문에 지출한 점을 계산하면 양사 간 투자 격차마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사진=김범준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사진=김범준 기자
또 삼성전자의 지난해 반도체 매출액(94조1600억원)과 비교하면 삼성전자의 R&D 지출은 다른 기업들과 비교해 소극적인 편이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매출액 대비 R&D 지출 비중은 8.8%로 전세계 반도체 기업들의 평균(13.1%)보다 낮았다. 전년 대비 R&D 지출액 증가율도 지난해에는 13%였는데 이는 2020년(23%)보다 줄어든 수치다.

특히 인텔의 R&D 투자는 파운드리에 집중된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해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한 인텔은 미국 내 200억달러(약 24조원) 규모의 반도체 신공장을 건립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에 170억유로(약 23조원) 규모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포함해 유럽 전역에 향후 10년간 800억유로(약 107조원) 규모의 반도체 시설을 짓기로 했다. 최근에는 미국 오리건주에 3년간 30억달러(약 3조8000억원)를 투자해 반도체 생산시설 D1X 공장을 확장한 '모드3'를 개장했다.

인텔 투자 파운드리에 집중…사실상 삼성 저격

파운드리는 삼성전자가 TSMC에 이어 전 세계 시장점유율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다. 인텔은 20A(옹스트롬·2㎚)과 18A(1.8㎚) 공정을 각각 2024년 초, 2024년 하반기부터 시작해 초미세 공정에서 삼성전자를 제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최근 펫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오리건주 힐스보로에 위치한 반도체 생산시설 D1X 팹 확장 개장 행사에 참석해 "새롭게 확장하는 D1X는 더욱 빠르게 공정 로드맵을 제공할 수 있도록 역량을 제공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인텔은 여기에서 차세대 실리콘 공정 기술 개발을 추진할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인텔의 공격적인 투자가 앞으로 경쟁할 TSMC, 삼성전자를 의식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파운드리 업계 절반 이상을 확보한 선두 TSMC와 추격 중인 삼성전자는 2나노의 도입 시기를 2025년으로 계획 중이다. 사실상 인텔이 선두 업체들에 도전장을 내민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인텔 미국 오리건주 모드 3공장 [사진=인텔]
인텔 미국 오리건주 모드 3공장 [사진=인텔]
최근 반도체 업계는 공통적으로 초미세 공정에서 수율(양품 비율)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이다. TSMC, 삼성전자가 오랜 시간을 들여 확보한 기술과 양산력을 불과 2년여 만에 구축하겠다는 것이 인텔의 야망이다. 인텔은 현재 퀄컴, 아마존 등을 예비 고객사 명단에 올린 것으로 전해졌지만 초기 수율 확보를 어느 정도까지 끌어올리느냐가 인텔 파운드리 경쟁력의 관건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부터 이어온 대규모 R&D 투자 기조는 올해와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인텔, 2024년 상반기 'GAA 공정' 도입 계획

인텔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2024년 상반기 '20A'부터 차세대 공정 기술 'GAA(Gate All Around)'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GAA는 기존보다 칩 면적은 줄이고 소비 전력은 감소시키면서 성능은 높인 신기술로,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어서 수율 확보에 대해 누구도 단언을 못하는 상황이다. 이 모험에 인텔이 수십조에 달하는 '돈폭탄'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인텔은 2024년이 되면 선두 업체를 모두 제치고 업계 1위로 올라선다. 인텔이 공정 계획을 현실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후발 주자가 나노 전쟁에 속도를 높이고 있는 상황을 선두 업체들이 간과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역시 올 상반기 GAA 기반의 3나노 양산을 시작한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TSMC도 2025년 전후로 GAA 기반의 2나노 공정을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삼성전자 화성 파운드리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 화성 파운드리 반도체 공장 전경 [사진=삼성전자]
IC인사이츠는 "(인텔의 대규모 투자 확대는) 새로운 IC 프로세싱 기술 출시를 주도하고 첨단 웨이퍼 파운드리 업계에서 주요 공급업체로 자리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인텔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파운드리 미세 공정이라는 게 단시간에 구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면서도 "수율 관리와 고객사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삼성전자가 인텔과의 투자금 격차를 좁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