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수의 희귀질환 이야기] 희귀질환의 ‘환자 중심’ 임상시험, 그 혁신과 미래
미국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 교수인 데이비드 파헨바움 박사는 희귀질환인 캐슬만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기도 하다. 201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특발성·다발성 캐슬만병(iMCD·idiopathic Multicentric Castleman Disease)에 대한 새로운 항체치료제로 인터루킨6(IL-6)을 표적(억제)으로 하는 ‘실툭시맙’을 승인해 치료제는 있었지만, 파헨바움 박사는 물론 환자 66%에게서 실툭시맙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캐슬만병과 루게릭병에서 벌어진 임상시험
스스로가 연구자이자 환자로서, 캐슬만 질환에 대한 연구 네트워크(CDCN·Castleman Disease Collaborative Network)를 구축하고 있던 파헨바움 박사는 환자들의 오믹스(Omics) 데이터들을 분석해 실툭시맙 치료에 대한 반응성이 상이하게 나타나는 환자들의 코호트 내 특징을 분석했다. 그 결과 인터루킨6의 하위 신호전달경로인 ‘PI3K’, ‘Akt’, ‘mTOR’를 억제하는 것이 그 자신은 물론 다른 환자들에게 또 다른 치료옵션을 보일 수 있음을 보고했다.

현재 mTOR 단백질이 지나치게 항진돼 있는 캐슬만 환자들을 대상으로 기존 면역억제제로 잘 알려져있는 라파마이신의 임상시험(NCT 03933904)이 진행(신약 재창출) 중이다. 데이비드 파헨바움 박사 역시 시험적으로 라파마이신을 투여받았고 현재까지 관해(remission)에 이르는 좋은 예후를 보이며 질환을 제어하고 있다.

캐슬만병과 발병률이 유사한 희귀질환인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 일명 루게릭병에서는 2008년 이탈리아에서 수행된 임상시험(44명의 환자 대상)을 통해 조울증 치료제로 쓰이는 리튬염이 당시의 ALS 표준치료제였던 릴루졸보다 효능이 더 크다는 발표를 했다.

해당 연구는 저명한 학회지인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PNAS)>를 통해 보고됐는데, 불과 3년 뒤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연구 결과가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리게 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기계 엔지니어였던 제임스 헤이우드 박사는 동생 스티븐 헤이우드가 ALS에 진단된 이후 2004년, ‘페이션 츠라이크미(PatientsLikeMe)’라는 이름으로 ALS를 포함한 희귀질환 환자들의 SNS 플랫폼을 선보였다. 이 플랫폼은 환자들 스스로가 서로의 정보와 의견을 온라인상으로 공유하며 치료와 재활을 위한 환자 경험 또한 공유하는 장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2008년 리튬염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자, 페이션츠라이크미에서는 자발적으로 리튬염을 복용하는 환자들의 경험과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할 수 있는 양식을 제공해 그 정보들을 분석했다. 그 결과 리튬염의 효과가 없다는 것을 보고한 것이다.

이 연구에는 무려 500여 명의 환자가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는데, (149명의 리튬염 복용군과 447명의 매칭 대조군) 훗날 진행된 전통적인 무작위 대조군 임상시험에서도 리튬염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 그대로 재현됐다.

희귀질환 임상시험의 키워드 ‘집단 데이터’와 ‘환자 중심’
소개한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희귀질환 임상연구에서의 ‘집단 데이터의 힘’과 ‘환자 중심’을 들고 싶다. 물론 모든 질환영역에서의 임상시험들이 ‘데이터의 규모와 질’을 요구하며, 환자에 대한 윤리적 디자인과 혜택을 고려한 ‘환자 중심’ 슬로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희귀질환 임상연구의 주체가 제약사와 연구자, 그리고 규제기관에서 환자로 변하고 있고, 기존 무작위 통제실험(RCT)으로는 불가능한 임상연구를 완벽하게 대체해가는 ‘집단 데이터’의 관점에서 이 두 키워드가 가진 무게감은 다른 질환영역에서와는 큰 차이를 가진다.

실제로 희귀질환과 같이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거나 치료제의 접근성이 떨어져서 의학적 미충족 수요가 있는 경우, 환자들은 직접 임상시험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특징이 있다.

페이션츠라이크미는 체계적인 플랫폼을 통해 환자들의 경험과 의견을 균질하게 수집하고 있다. 실제로 페이션츠라이크미는 FDA와 함께 규제기관이 요구하는 다양한 가이드라인을 플랫폼 안에 구현해가면서, 현재는 다양한 질환영역에서 기존 RCT를 대체·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임상 연구도 수행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이야기하는 PRO 연구(PatientReported Outcome study)의 전신이라고도 불릴 만하다.

2019년 희귀질환 학회지에는 희귀질환 환자들의 의견을 통해, 성공적인 희귀 질환 임상시험에 있어서의 제언을 발표했다. 해당 연구는 유럽의 희귀질환·소집단 임상시험의 방법론을 개발하는 컨소시엄 프로젝트를 통해 진행됐다.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요약된다.

성공적인 희귀질환 임상시험을 위한 제언
① 최대한 빠른 시점에 대상 환자군을 연구 디자인 논의에 참여시킬 것 (최소한 아래 내용을 환자와 함께 결정할 것)
•연구의 최종 지표와 측정 방법
•연구 기간
•연구 참여 및 제외 환자 기준
•참여환자에게 제공되는 정보

② 위약군은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할 것(cross-over, registry에서의 환자 히스토리 혹은 유사연구에서 과거 환자 매칭, 이 과정에서 환자집단과 조기에 협업할 것)
③ 임상시험에 관여하는 많은 사람을 교육
④ 연구가 종료됐을 때, 환자에 대한 알림과 후속 조치 등

캐슬만병을 앓고 있는 데이비드 파헨바움 박사의 사례는 구축된 환자 네트워크로 확보한 다양한 빅데이터 정보를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환자 특성을 구분해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을 것인지에 대한 화두를 던져준다.

실제로 희귀질환에서는 환자들만의 정보집단을 전향적으로 수집하는 등록(registry) 프로젝트들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구축된 희귀질환 환자 등록 사업은 다양한 의학적 질문에 대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중요한 데이터소스가 된다.

실제 희귀질환 치료제를 개발해온 많은 글로벌 제약사가 치료제 및 질환에 대한 임상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발표하기 위해 등록 사업을 연구의 일환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허가과정에서 얻지 못한 새로운 임상 근거들을 발표해오고 있다.

양(Quantity)이 모여 질(Quality)이 되는 순간… 희귀질환 등록, 실사용 근거의 힘
등록 데이터베이스는 희귀질환 환자 데이터를 전향적으로 취합하기 위해 계획되고 의도된 방식의 빅데이터 수집 과정이다. 최근 거의 모든 질환 분야에서 논의되고 있는 실사용 정보 및 근거(RWD·RWE)의 체계화된 형식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21세기 치유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RWD·RWE 관련 새로운 시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FDA는 희귀질환이나 소아질병 치료제의 심사허가를 위해 RWD·RWE를 활용한 관찰연구 수행을 허용하는 등 RWD·RWE를 지속적으로 활용해오고 있다. 허가심사 분야에서도 이미 희귀·항암 치료제의 안전성 및 효과 평가에 RWD·RWE가 활용되고 있다.

특히 대상 환자군이 극소수인 희귀 질환 치료제에서는 외부 대조군을 활용한 자료를 기반으로 의약품 허가가 이뤄지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아벨루맙은 입증된 표준치료요법이 없는 희귀질환인 전이성 메르켈세포암 치료제다. 임상시험 과정 중에 대조군과의 직접 비교가 불가능했는데, 아벨루맙에 대한 단일군 임상시험 결과와 MCC 레지스트리로부터 얻어진 외부 대조군의 결과를 간접 비교하여 규제당국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

에쿨리주맙은 또 다른 희귀질환인 발작성 혈색소뇨증의 치료제로 최초 승인 시 수혈 과거력이 있는 환자에게만 사용이 승인됐다. 이후 PNH 레지스트리 분석을 통해 수혈 과거력 유무와 상관없이 에쿨리주맙의 유효성 및 안전성을 입증해 적응 대상군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처럼 환자 집단 데이터 구축은 전통적인 RCT가 불가능한 희귀질환 분야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그 가치를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접근법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도 2020년 국가 주도의 국가 통합 바이오 빅데이터 구축 사업이 시작됐는데, 그 첫걸음이 바로 희귀질환 환자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희귀질환, 전통적인 RCT 임상시험의 디자인 혁신을 요구하다
2008년 발표된 이탈리아의 ALS 환자를 대상으로 한 리튬염 복용군 환자 44명의 임상시험 결과가 재현되지 않았던 사례를 보면, 희귀질환에서의 신뢰할 수 있는 임상시험의 수행과 디자인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단연 가장 큰 제약사항은 임상시험에 참여할 피험자 수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점이다. 피험자수가 제한적이고, 환자들의 분포 또한 불균질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대규모 임상시험의 방법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경우에 따라서는 임상시험 설계단계에서 효과 크기, 유의 수준, 검정력을 기반으로 산출한 연구대상자의 수가 실제 참여 가능한 피험자의 수(실제 유병환자 수)를 초과해 임상 시험의 연구기간이 장기화되거나, 임상시험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발생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근거기반의학의 선두에서 임상시험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온 RCT를 레지스트리 혹은 다양한 RWD·RWE로 ‘대체’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 RCT를 ‘보완’하는 노력 또한 다양한 임상시험 혁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희귀질환에서도 RCT로 대표되는 EBM에 기초한 의학적 결정은 유효하기 때문이다.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도 <희귀질환 등소집단 대상 임상시험 가이드라인>을 발간했는데, 원칙적으로는 희귀질환 또는 소아 대상으로 하는 의약품의 임상시험 역시 일반적인 질환에서의 임상시험과 같이 RCT를 수행하여 안전성과 유효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불가피하고 그 타당성이 인정되는 경우에 한 해 전통적이지 않은 임상시험도 고려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한 바 있다.

또 임상시험의 어려움이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각 나라의 규제기관은 임상시험 프로토콜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희귀질환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조인수의 희귀질환 이야기] 희귀질환의 ‘환자 중심’ 임상시험, 그 혁신과 미래
전통적인 RCT 원칙 아래 희귀질환의 특수성을 반영한 임상시험 연구 사례
뮤코다당증 4형 질환은 리소좀에 존재하는 β-글루쿠로니다아제 효소의 유전자 변이로 인해 효소의 기질인 글리코스아미노글리칸(GAG)이 세포 내 축적되는 리소좀 축적질환 중 하나다. 멥세비(Mepsevii, vestronidase alfa)를 주입하는 효소대체요법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

2017년 FDA는 단 12명에서 진행된 임상시험으로 본 의약품을 시판 승인했다. 만약 12명으로 전통적인 RCT로 대조군(위약군)과의 비교 임상을 수행한다면 첫째, 임상적 유효성을 입증할 수 있는 통계적 검정력의 환자 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둘째, 대조군 환자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FDA는 멥세비의 특이적인 임상적 효과와 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임상 디자인을 제시해 어려움을 극복했다.

우선 4개의 환자 군으로 나눠 12명의 환자를 무작위 이중맹검으로 진행했다. 0주, 8주, 16주, 24주에 멥세비 치료가 시작됐다. 48주 차에 모든 환자가 오픈라벨로 멥세비를 투여받았다. 임상시험의 1차 평가지표는 6분 동안 걸어는 거리와 소변의 GAG양을 측정해 평가했다.

그 결과 그룹마다 멥세비가 투여되는 시점에서 8주, 16주, 24주 그룹의 1차평가지표가 특이적으로 개선되는 양상을 보였다. 4개의 그룹에서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니 비록 환자수는 적지만 각 시점에서 나타나는 개선 지표의 등장은 멥세비 특이적으로 나타나는 효과라 판단할 수 있었다.

최근 바이오마커 기반의 항암제를 개발할 때 바구니형 임상시험(basket trial)이라는 개념이 도입됐다. 이는 암종과 상관없이 환자가 가진 특정 바이오마커의 균질성만을 기준으로 환자군을 모아 동일한 치료를 수행하는 것이다. 기존 같은 암종, 다양한 유전적 차이를 가진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우산형 임상시험(umbrella trial)과 비교된다.
[조인수의 희귀질환 이야기] 희귀질환의 ‘환자 중심’ 임상시험, 그 혁신과 미래
현재 암종을 불문하고 NTRK 융합 변이가 있는 환자에게 승인된 라로트렉티닙과 MSI-H 혹은 dMMR 바이오마커 변이(약 5%)가 있는 절제불가능한 전이암에 승인된 펨브로리주맙이 바구니형 임상시험의 혜택을 받았다.

이론적으로는 암이 아닌 유전성 희귀질환에서도 이러한 접근방법을 통해 환자 수가 적다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이 논의되고 있다(현재까지는 실제 시판 승인된 사례가 없다).

유전성 희귀질환의 원인은 주로 특정 유전자의 변이로 인해 비교적 단일 원인을 가진다고 할 수 있지만, 임상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의 양상은 매우 광범위한 특징이 있다. 비특이적으로 나타나지만 하나의 바이오마커(변이 유전자)를 보이는 질환양상을 고려하면 바구니형 임상시험과 같은 접근을 희귀 암종이 아닌 희귀질환에도 도입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희귀질환, 임상시험을 혁신하다
신약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꼽히는 임상시험. 이때 얻어진 데이터를 기반으로 신약의 인허가가 결정된다. 희귀질환은 규제기관의 승인을 받더라도 개발 과정 중에 충분한 근거를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시판 이후에도 다수의 4상 연구와 관찰연구들이 수행되고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 희귀질환을 위한 최적표준(gold standard)과 같은 임상시험 디자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모든 희귀질환 임상시험의 계획과 설계과정은 철저히 개별화되고, 사전에 정의되고, 논의돼야 한다.

그 과정에 환자의 참여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또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통합하는 기술 적 발전에 힘입어, 전혀 새로운 종류의 임상 시험 플랫폼과 정보의 유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희귀질환은 그 특성상 보수적인 임상연구의 혁신적인 변화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분야인 것이다.

새로운 임상개발 과정이 기존 규제절차를 과감하게 혁신하고, 허가기관들은 전향적으로 혁신을 검증해 합리적인 규제 변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서로 맞물려야 한다. 또한 많은 환자가 임상시험의 주체가 되어 다양한 희귀질환 치료제의 접근성이 더욱 가까워지기를 기대해본다.

<저자 소개>
[조인수의 희귀질환 이야기] 희귀질환의 ‘환자 중심’ 임상시험, 그 혁신과 미래
조인수
사노피-아벤티스 코리아 스페셜티케어 사업부에서 희귀질환 메디컬팀을 맡고 있다. 베링거인겔하임, 바이엘 임상의학부팀에서 한국 및 아시아 국가의 혁신신약 도입을 위한 임상연구와 의과학자문으로 근무했다. KOTRA-Grants4Apps의 스타트업 육성프로그램에서 헬스케어 스타트업 글로벌 진출 및 제약사 지원 연계 역할을 수행한 바 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11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