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약 개발이라는 단어 앞에 K자를 붙이려면
코로나19 팬데믹이 발발한 지 1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선진 제약·바이오기업이 수 개의 백신을 성공적으로 개발했다. 미국의 제약회사도 팬데믹의 게임체인저가 될 가능성이 큰 경구용 치료제를 개발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긴급사용승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팬데믹 이전에는 생각도 못할 빠른 속도로 성과를 낸 이면에 혁신의 가치를 최고로 삼는 제약 선진국의 비즈니스 생태계가 자리한다. 모든 산업은 연구 개발부터 생산, 허가, 가격 결정, 유통을 아우르는 이해당사자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역동적인 관계를 형성하는데 이를 비즈니스생태계라고 부른다.

한국은 어떤가. 국내 회사가 항체치료제를 자체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사용에 제한이 많아 시장의 반응은 아직 미지근하다. 임상 3상 시험에 들어간 백신이 있지만 허가를 받더라도 글로벌 경쟁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동안 한국은 자동차, 반도체, 스마트폰, 가전과 같은 하드웨어 산업에서 전 세계를 리드했다. 최근에는 대중음악이나 영상같은 콘텐츠 분야에서도 한국의 성장세가 놀랍다.

그런데 왜 신약개발에서는 영 맥을 못 출까. 물론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에서 총 35개의 신약이 개발됐다. 하지만 글로벌 신약의 반열에 올라 상업적 성공을 거둔 사례는 하나도 없다.

국내 제약기업이 독자적으로 신약을 개발할 자본과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제네릭 약가를 높게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제약산업을 육성해왔다. 따라서 글로벌 신약보다는 내수용 제네릭을 위주로 제약산업이 발전했다. 그 결과 국내 제약기업의 연구개발 집약도(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비 비율)는 글로벌 상위 제약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8.9%에 불과하다.

정부는 제약산업을 육성하려고 계속 지원을 늘려왔다. 덕분에 최근에는 기업뿐만 아니라 대학과 연구소, 바이오벤처에서도 신약 후보물질 발굴에 관심이 높아져 2020년 기준으로 559개의 신약 후보물질을 대상으로 활발히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다. 국내 제약기업이 해외 제약사에 신약 후보물질을 기술 이전하는 경우도 늘었고 해외 규제기관에 직접 허가를 신청하는 신약의 숫자도 증가했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국내 파이프라인이 개발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어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언제까지 해외 제약사에 기술을 이전하는 방식으로는 국내 제약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 후기 임상시험까지 자체 진행할 수 있는 자본, 경험과 역량을 확보하여 글로벌 블록버스터 신약을 개발하고 시장에서 성공 스토리를 써야 한다.

한국이 성공적으로 신약을 개발하는 국가의 반열에 오르려면 제약 비즈니스생태계가 다음처럼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첫째, 신약개발 관련 정책을 총괄할 컨트롤타워가 상설기구로 설립돼야 한다. 운영 기간이 한정된 사업단이나 위원회는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신약개발 컨트롤타워에 적합하지 않다. 또한 독립적인 예산을 갖고 자체 인사권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연구지원 뿐만 아니라 바이오클러스터를 포함한 인프라 활용, 인재양성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계획이 신약개발 컨트롤타워를 통해 나오고 전파돼야 한다.

둘째, 신약개발 연구 재원을 획기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제약기업 및 바이오벤처에 투자하는 최소 1000억 원 이상의 펀드를 8개 이상 조성하고 여기에 투입되는 재원을 정부와 민간이 나누어 부담하는 게 한 방법이다. 또한 투자회사와 바이오벤처, 제약기업 사이에 기술이전과 정보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도록 돕는 상설 네트워크도 필요하다. 아울러 국내 제약기업이 선진 해외 기업과 신약개발이나 의약품 판매를 위해 체계적으로 협력하는 ‘상설 회의체’를 만들고 여기에 국내외 기업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셋째, 체계적인 인재 양성 및 인력 공급이 시급하다. 정부는 최근 반도체산업에서 향후 10년간 필요한 인력을 총 3만6000명으로 추산하고 어떻게 부족한 인력을 양성할지 세부적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제약업계에 필요한 인재 양성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그나마 제약바이오산업 특성화대학원과 2021년 새로 지정된 규제과학대학원이 있지만, 이 두 과정은 신약개발에 특화된 과정이 아닐 뿐만 아니라 교육과정 계획이나 운영에 제약기업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현장의 요구가 반영되기 어렵고 학위를 취득한 인재가 관련 산업의 인재로 흡수되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대학과 제약기업이 연계해 신약개발에 집중된 계약학과나 주문식 교육과정을 대학에서 운영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넷째, 빠르게 발전하는 바이오 과학에 허가 제도가 발 맞추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심사 체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돼야 하고 원활한 전문인력 확보가 가능해야 한다. 식약처의 고질적인 심사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외부 심사자문위원회를 상설로 설치하고 임상시험계획서 승인이나 신약 허가 결정에 심사자문위원회의 의견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시스템 도입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신규 심사 인력을 양성하고 식약처의 심사 전문가가 빠르게 발전하는 규제과학의 트렌드를 배울 수 있도록 재교육 과정이 마련돼야 한다.

마지막으로, 혁신 신약이 신속하게 허가되고 보험급여가 이루어져 환자의 신약 접근성을 보장해야 한다. 한정된 건강보험 재정에만 의존하는 대신에 별도의 기금을 조성하는 방안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때가 됐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AIFA 5% 펀드’와 같이 병원, 약국, 제약·바이오기업, 의료기기업체가 수익의 일정 비율을 출연하여 기금을 조성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하다. 아울러 매년 증가하는 위험분담제 환급액 전액을 재난적 의료비 지원 사업의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 당연하지만, 별도의 기금은 기금 마련에 참여한 기관 또는 기업에서 수익이 발생한 질환과 동일한 질환군의 환자를 위해 사용돼야 한다. 같은 논거로, 위험분담제 환급액 또한 환급액이 발생한 질환과 동일한 질환군의 환자가 수혜 대상이 돼야 한다.

전례없이 빠른 속도로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성공한 미국과 달리 한국은 자본력도, 개발의 토대가 될 만한 기초과학 기술력도, 산업계-대학-연구기관의 협력 경험도 아직은 모두 부족하다. 하지만 정부가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기초연구부터 임상시험, 규제에 이르는 전문 인력 양상에 더욱 힘쓴다면 신약개발이라는 단어 앞에 K자를 붙일 날이 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