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는 다른 산업에 비해 가치사슬이 매우 길다. 특허 개발부터 임상시험, 투자유치, 라이선스 아웃 등 자본회수에 이르는 과정이 최소 10년 이상 걸린다. 경쟁기업과의 기술격차를 좁히고 신기술을 내재화하기 위해 오픈 이노베이션은 필수다. 바이오 클러스터는 이런 오픈이노베이션을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
‘글로벌 바이오산업의 메카’의 스카이라인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있는 켄달스퀘어 전경 / shutterstock
‘글로벌 바이오산업의 메카’의 스카이라인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있는 켄달스퀘어 전경 / shutterstock
‘글로벌 바이오산업의 메카’ 미국 켄달스퀘어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시에 있는 켄달스퀘어는 미국 서부의 실리콘밸리와 함께 미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양대 축으로 꼽힌다. 실리콘밸리의 중심이 아마존, 애플과 같은 정보기술(IT)·플랫폼 기업이라면 켄달스퀘어를 움직이는 산업은 바이오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켄달스퀘어는 허허벌판이었다. 2000년대 들어 매사추세츠공대(MIT), 하버드대 등의 우수 연구인력과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등 의료기관이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협업하면서 생태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약 4만㎡(1만2000평)에 불과한 곳은 이후 화이자, 존슨앤드존슨 등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가세하면서 명실상부한 글로벌 바이오산업의 메카가 됐다. 미국 10대 제약사 중 9곳이 이곳에 연구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700여 개의 바이오벤처가 들어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켄달스퀘어의 ‘심장’ 역할을 하는 곳이 있다. ‘랩 센트럴’(Lab Central)이다. 랩 센트럴은 실험실을 바이오 스타트업에 빌려주는 공용 실험 기자재 대여 서비스 공급자다. 하지만 이 업체가 세계 바이오업계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은 단순한 실업 기자재 대여업체를 훨씬 뛰어넘는다. 몇 가지 숫자만 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2013년 문을 연 랩 센트럴이 육성한 바이오벤처는 109개에 달하며 이 중 5개 기업이 증시에 이름을 올렸다. 입주기업의 총 투자유치 금액은 41억 달러에 이른다. 50개가 넘는 글로벌 기업들이 랩 센트럴이 가꾼 기업에 투자했다.

오픈이노베이션의 결정판 ‘랩 센트럴’
그렇다 보니 바이오산업을 육성하려는 많은 국가들이 랩 센트럴의 성공 비결을 분석하고 도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분석한 랩 센트럴의 성공비결은 단순한 공간·설비 제공업체가 아니라 바이오 창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랩 센트럴 인근 지역의 카페나 맥주바에서 벌어지는 ‘즉석 미팅’이 좋은 예다. 액셀러레이터나 벤처캐피털 등 초기기업 투자자들이 카페나 펍에서 젊은 바이오 창업자들을 만나 기술과 사업 아이디어를 듣는다. 아이템이 좋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투자 제안을 하기도 한다.

투자자들은 랩 센트럴 생태계에 속한 청년이라면 훌륭한 바이오 인력이며, 창업을 추진하고 있거나 막 창업한 신생기업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평판 조회가 제대로 안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작위 투자대상 발굴작업’이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랩 센트럴식 즉석 미팅은 바이오 클러스터가 어떻게 발전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여기에 ‘오픈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의 요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2003년 미국 버클리대 헨리 체스브로 교수가 처음 내놓은 오픈이노베이션의 개념은 간단하다. 연구개발(R&D)의 전 과정을 한 기업이 모두 수행하는 ‘폐쇄형 혁신’으로는 빠르게 진보하는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는 만큼 개방형 혁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픈이노베이션은 다시 ‘안으로 열린 기술혁신’과 ‘밖으로 열린 기술혁신’으로 나뉜다. 전자는 제품 아이디어와 기술을 외부에서 도입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체 기술을 스스로 사업화하지 않고 매각하거나 분사하는 것을 말한다.

서울대 시흥캠퍼스의 오픈이노베이션 도전
최근 들어 국내 산업계에도 오픈이노베이션이 적극 도입되고 있다. 바이오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의료·바이오 융복합단지를 표방하는 서울대학교 시흥캠퍼스는 ‘한국의 켄달스퀘어’를 꿈꾸고 있다. 배곧신도시에 종합병원을 건설하고 인큐베이팅센터를 열어 서울대병원 출신 의료인들과 서울대병원 기술특허를 활용한 창업자들을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최근 시흥캠퍼스 실험실 운영회사 공모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바이오 인큐베이팅 전문업체 이그나이트 이노베이터스(대표 김희준)는 랩 센트럴처럼 실험실 운영과 바이오 기업의 해외 진출, 투자 유치 등을 담당하게 된다. MIT와 하버드 등 대학이 켄달스퀘어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서울대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또 시흥과 가까운 인천 송도에 삼성바이오로직스, 셀트리온 등 대형 바이오 기업이 있는 만큼 산학연 인프라도 잘 갖춰진 편이다.

동물실험과 미생물 멸균시설 사업을 하는 우정바이오는 경기도 화성 동탄에 바이오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있다국. ‘우신클(우정바이오신약클러스터)’이라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지하 6층, 지상 15층의 자사 소유 빌딩에 바이오 스타트업과 실험시설, 벤처투자자, 회계법인, 법무법인 등을 입주시켜 신약개발에 필요한 인프라를 한데 모으는 사업이다. 올 하반기 본격적인 서비스에 착수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켄달스퀘어가 바이오 클러스터의 성공사례인 건 분명하다. 그 비결은 기술 발굴, 임상, 투자 등의 프로세스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산학연이 끈끈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은 데 있다. 여기에서 어느 하나만 빠져도 전체가 움직이지 않는다. 무늬만 흉내 낸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실적 쌓기용’ 클러스터 유치 경쟁이 위험한 이유다.
[홍순재의 자본시장 OVERVIEW] 바이오 창업 생태계, 오픈이노베이션이 핵심
<저자 소개>

[홍순재의 자본시장 OVERVIEW] 바이오 창업 생태계, 오픈이노베이션이 핵심
홍순재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재무자문본부 상무

싱가포르국립대 경영대학원(MBA)을 나와 KDB산업은행 싱가포르지점에서 이슬람채권 발행 업무와 투자은행(IB)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재무자문본부에서 상무로 재직 중이다. 기업 M&A와 투자유치자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글은 <한경바이오인사이트> 매거진 2021년 7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