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전자상가의 컴퓨터 부품 매장. 사진=뉴스1

서울 용산전자상가의 컴퓨터 부품 매장. 사진=뉴스1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채굴에 사용됐던 그래픽카드가 버젓이 신제품으로 둔갑돼 판매됐다는 의혹이 일며 온라인 상에서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게임용 PC 핵심 부품인 그래픽카드는 올 초 반도체 대란과 함께 암호화폐 채굴장에 끌려가 물량 부족으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등 '품귀 현상'을 빚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암호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채굴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오자 채굴장에서 혹사당했던 재포장 제품이 새 제품으로 유통됐다는 의혹입니다.

10일 독일 하드웨어 사이트 '3D센터'에 따르면 올해 그래픽카드의 가격은 지난 2월 기준 이달 4일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독일 내 엔비디아와 AMD의 최신 그래픽 카드의 평균 가격은 권장 소비자 가격(MSRP)의 153% 수준으로, 가격이 최정점(엔비디아 304%, AMD 201%)을 기록했던 지난 5월 초 대비 가격이 크게 하락했습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다나와리서치 등에 따르면 엔비디아 RTX3060 그래픽카드는 지난 5월 280만원까지 올랐다가 지난 달 셋째 주부터 80만원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엔비디아 RTX 3080기준 이전 300만원에 거래되던 일부 모델은 현재 170~180만원에 위치해 있습니다.

최근 들어 그래픽카드 가격이 떨어진 건 시장에 풀린 물량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암호화폐 가격이 올 초 대비 하락세고, 암호화폐 채굴 시장을 주도하는 중국이 자국 디지털 화폐 활성화와 암호화폐 채굴 금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중국 정부가 비트코인 채굴 금지 규제를 발표한 이후 비트코인 채굴장 90% 이상은 폐쇄됐습니다.
서울 용산전자상가의 한 컴퓨터 부품 취급 매장. 사진=뉴스1

서울 용산전자상가의 한 컴퓨터 부품 취급 매장. 사진=뉴스1

암호화폐 채굴은 고성능 컴퓨터로 복잡한 수학 연산을 해결해 암호화폐 이용자 간 거래 명세를 정리하고 그 대가로 암호화폐를 받는 방식인데요, 이 과정에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가 들어간 그래픽카드가 활용됩니다. 당초 고해상도 PC 게임 구현 등을 위해 활용돼야 할 그래픽카드가 본래 목적과 달리 다르게 쓰였던 것이죠.

지난해 9월 엔비디아가 내놓은 RTX 30 시리즈와 AMD 라데온 60 시리즈는 뛰어난 성능으로 주목받았지만. 소비자들은 천정부지로 솟은 가격 탓에 그간 제품을 구매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 정부가 강도 높은 채굴 규제를 시행하고, 엔비디아가 'LHR 라인' 등 채굴 능력 막은 그래픽카드를 내놓자 채굴용 그래픽카드의 활용성이 떨어지면서 그래픽카드의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채굴용으로 혹사당했던 중고 그래픽카드가 신제품으로 둔갑돼 판매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국내 소비자의 사례가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각종 정보통신(IT) 커뮤니티에는 국내 유통사 및 총판을 통해 구매한 그래픽카드 새 제품이 실제론 암호화폐 채굴에 활용된 제품으로 의심된다는 게시글이 잇따라 올라왔습니다.

채굴용 그래픽카드는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최대 성능으로 돌려야 하다 보니 언제든지 제품 및 PC에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어 주의가 요구됩니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피해는 공식 사후서비스(AS)를 받는 것도 어려운데요, 이같은 채굴용 그래픽카드는 외형 면에선 육안으론 큰 차이가 없어 소비자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한 게시자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을 보면 그래픽카드와 메인보드를 연결하는 슬롯 분위의 골드핑거(금박 접점)에 결착 흔적, 비닐 내부에 이물질이 보입니다. 신제품이라 보기엔 사용 흔적이 보이는 것입니다. 나사 마모 등 중고 사용 흔적도 보이는데요, 이 사례를 시작으로 제품 보증을 인증하는 시리얼 넘버가 불일치한 사례 등 여러 의심 사례가 보고됐습니다.

논란이 확산되자 총판과 유통사는 "우리는 문제가 없다" "신제품을 판매했다"고 입장을 냈는데요, 그러면서도 제조사에 QC(품질보증) 요청, 소비자에 환불 의사를 밝히는 등 대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국내 그래픽카드 유통구조는 MSI, 기가바이트 등 글로벌 제조업체가 엔비디아 등의 칩을 활용해 만든 그래픽카드를 수입사가 이를 수입해오는 형태입니다. 이후 수입사가 이를 총판에 넘기고, 이를 다시 소매업자 및 대리점에게 넘기는 다단계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자가 있는 제품을 구매해도 책임 소재를 정확하게 따지기 어려운 구조인데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오랜 기간 그래픽카드의 가격이 떨어지기만을 바랐던 소비자를 위해서라도 좀더 투명한 유통 구조가 장착되기를 바라봅니다.

배성수 기자 baeb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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