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술지 <네이처> 10월 1일자 표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원형의 실험장비가 실렸다. 마치 독일의 전통 빵인 ‘바움쿠헨’처럼 생긴 이 장비는 화학의약품을 합성하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IN A SPIN’. 표지에 쓰인 제목처럼 회전이라는 간단한 물리적 원리를 이용해서다.
[과학에서 산업찾기] 원통을 돌려서 화학약품 만드는 원통 화합물 합성 시스템

용매 20개가 원형 띠를 이루며 시험관처럼 작동

여러 분야에서 실험 자동화가 이뤄지고 있지만 의외로 합성의약품의 합성은 여태껏 완벽한 자동화가 불가능했다. 단계별로 화합물을 분리하고 정제하는 플라스크가 달라, 한 단계의 공정을 마치면 다음 단계로 이동시켜야만 한다. 그만큼 공정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커진다.

일반적으로 한 번에 화합물을 합성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여러 플라스크와 밸브를 연동하는 방법으로, 반응이 끝나면 자동으로 밸브가 열려 다음 플라스크로 이동할 수 있게끔 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 방법은 연속된 액체 흐름을 제어하는 방법이다. 흐르는 용매에 또 다른 반응물이 포함된 새로운 용매를 주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경우 균일한 품질의 화합물을 얻기가 어렵고 액체의 흐름을 제어하는 것 자체가 고도의 공학 기술을 필요로 한다.

<네이처>에 실린 논문은 화합물 합성의 자동화 문제를 아주 단순한 물리적 원리를 이용해 해결했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한국 기초과학연구원(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의 바르토슈 그쥐보프스키 그룹 리더팀은 서로 섞이지 않는 용액들이 밀도 순서대로 쌓이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원통 안에 반응물들이 들어 있는 용매를 넣고 빠르게 회전시키면 원심력으로 인해 밀도가 높은 액체는 바깥쪽으로 쏠리며 층을 만든다. 용매의 밀도에 따라 차례대로 원형의 띠가 생기고, 각 용매 층은 일종의 시험관이 된다. 논문에 따르면 서로 다른 밀도의 용매를 10~20개 이상 섞은 뒤, 원통의 용기에 넣고 회전시켰다. 그 결과 각 액체는 150㎛의 두께로 동심원을 그렸다.

이 원통의 시스템은 용매층을 이용해 합성 단계를 조절한다. 연구진은 이 시스템을 이용해 통증과 발열 완화제로 쓰였던 페나세틴(지금은 신장암을 발생시킬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판매가 중지됐다)을 합성했다. 페나세틴은 가장 밀도가 낮은 원 안쪽의 용매에서부터 반응을 시작해 3단계에 걸쳐 합성됐다. 마찬가지 원리로 아메바 감염을 막는 딜록사니드는 4개의 용매를 이동하며 합성됐다.

실험에서 합성한 두 화합물은 합성 과정이 비교적 단순하다. 이론적으로는 최대 20단계에 걸친 화합물 합성이 가능하지만 복잡한 단계의 화학반응까지 원활하게 이뤄질지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 연구가 의미 있는 이유는 원심력이라는 간단한 물리적 원리를 이용해 수십 년간 과학자들이 골머리를 앓던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이 10 단계 합성 과정만 소화할 수 있어도 대다수의 합성의 약품의 자동화가 가능해진다. 그간 의약품 합성에 들어가던 비용을 상당 부분 절감해줄 것으로 보인다.

API 시장에 도움될까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중간 산물을 확인하기가 쉽다는 점이다. 의약품을 합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 즉 분해 산물(중간 산물)은 간혹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 화학반응이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중간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간 산물을 추출해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다.

IBS가 개발한 합성 시스템은 용매가 띠처럼 구분돼 있기 때문에 중간 산물 추출이 가능하다. 실제 연구진은 혼합물 속에서 필수아미노산 중 하나인 ‘페닐 알라닌’과 ‘p-니트로벤조에이트 나트륨’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중간 산물 추출이 용이하다는 특징은 원료의약품 시장(API·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원료의약품은 판매하는 완제의약품 바로 전 단계의 물질을 의미한다. 대개 원료의약품 제약사들은 API와 화합물 원료에서 얻어지는 중간 산물인 의약중간체(PI·Pharmaceutical Intermediates)를 판매해 수익을 얻는다. 거대 원료의약품 제약사로는 한미정밀화학, 대웅바이오, 삼천리제약 등이 있다.

최근 제네릭 의약품(복제약) 시장이 커지면서 API 시장도 함께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연구는 API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줄 수 있다. 그간 얻기 어려웠던 중간 산물들도 취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 시스템이 의약품 합성의 자동화를 가져오려면 다단계 화합물을 합성할 수 있는지가 우선적으로 확인돼야 한다”며 “기존에 추출하기 어려웠던 중간 산물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꽤 흥미롭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과학에서 산업찾기] 원통을 돌려서 화학약품 만드는 원통 화합물 합성 시스템
[과학에서 산업찾기] 원통을 돌려서 화학약품 만드는 원통 화합물 합성 시스템
최지원 기자 jw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