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사진=한경DB
약 3억5000만명의 이용자를 보유한 세계 최대 온라인 결제 기업 페이팔이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암호화폐)을 지원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지난 21일 페이팔은 "내년부터 모든 이용자들이 비트코인(BTC), 이더리움(ETH), 비트코인캐시(BCH), 라이트코인(LTC) 등의 가상자산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는데요. 이에 가상자산을 활용한 결제·투자 수요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관련 산업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 같은 소식에 힘입어 최근 비트코인 시세가 연중 최고점을 경신,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빠른 속도로 활성화되고 있는데요. 유독 국내 거래소들만 이로 인한 수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모양새입니다. 가상자산에 대한 각종 규제와 정부의 부정적인 기조로 인해 국내 투자자들조차 해외 거래소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인도 '서학개미'가 대세…세계 1위였던 국내 거래소는 '환전소' 전락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사진=연합뉴스)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사진=연합뉴스)
최근 증권가에서는 한국 주식 시장 대신 미국 등의 해외 주식 시장에 투자하는 이른바 '서학개미' 열풍이 불고 있는데요. 코인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해외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이 국내 시장보다 더 많은 투자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8년 1월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사진)이 "가상징표(가상자산)는 도박이며 거래소를 폐쇄하겠다"고 발언한 이후 국내 거래소를 포함한 가상자산 업계는 잔뜩 움츠러들었습니다. 이후 경찰은 국내 거래소 코인원이 2016년부터 운영해온 마진 상품을 도박으로 규정, 검찰에 송치하게 되면서 사실상 가상자산과 관련한 모든 금융상품의 출시도 올스톱 됐습니다.

그사이 가상자산공개(ICO) 열풍이 끝나면서 많은 수의 코인들이 자취를 감췄고 열광했던 개미들도 떠났습니다. 대신 미국 시카고상품거래소(CME) 등이 기관투자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비트코인 선물 상품을 내놓으면서 제도권 금융 기관들의 유입이 시작됐습니다. 이에 가상자산 시장은 시가총액이 높은 비트코인 등의 종목을 기반으로한 파생상품 거래 위주 시장으로 급변했습니다. 마치 원유나 금 선물 시장처럼 말이죠.

예컨대 미국 내 대표적인 가상자산 거래소인 코인베이스(Coinbase), 비트파이넥스(Bitfinex), 크라켄(Kraken)등은 현재 모두 합법적으로 원금의 3~5배 레버리지가 가능한 마진 거래 상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비트파이넥스와 크라켄의 경우 CME보다 더욱 공격적인 가상자산 선물 상품도 함께 제공합니다. 바이낸스, 후오비, 오케이엑스 등 중국계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이들보다 더 큰 레버리지 투자가 가능한 파생상품들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해당 거래소의 이용자들은 가상자산 현물 변동성에 대한 리스크 헤지(hedge)가 가능해지면서 더욱 안정적인 투자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필요한 경우 레버리지를 늘려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도 있으며, 아예 선물 공매도 포지션에 투자해 하락장에서도 수익을 내는 전략을 구사할 수도 있게 됐죠. 투자 상품에 들어가지 않은 여분의 가상자산은 디파이 상품에 예치해 암호화폐로 이자를 받거나 하는 등 포트폴리오를 다각화 하는 전략 구사가 가능해 졌습니다.

반면 국내 거래소에서 투자를 하는 경우 레버리지 투자 자체가 불가능한 데다 하락에 대한 리스크 헤지 수단이 전무합니다. 국내 거래소 이용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투자 전략은 '쌀 때 사서 비쌀 때 팔기' 뿐입니다. 하락장에 대한 대응 전략은 '현금화'가 전부죠. 리스크 헤지가 필수적인 전문 트레이더들이나 기관투자자들의 경우 현실적으로 이용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기관투자자들은 국내 시장 진입 자체가 안 되는 구조인 것이죠.

개인투자자들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뜩이나 내년부터 20%의 양도세도 내야 하는데, 정부 기조로 인해 해외에 비해 불리한 조건과 턱없이 모자른 기능으로 투자를 해야 하니 다들 해외 거래소로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지나치게 억압적인 규제 환경이 국내 생태계를 파괴하고 해외 거래소들의 배만 부르게 해 준 셈입니다. 이는 국부 유출과 세수 감소, 국내 업계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한국에선 '도박' 취급하는 사이…가상자산 시장 일 거래액 '92조'

지난 2017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가상자산 거래량(사진=코인마켓캡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지난 2017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가상자산 거래량(사진=코인마켓캡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원래 가상자산 시장 규모는 우리나라가 해외 시장에 비해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불과 3년 전인 2017년만 해도 국내 거래소들이 전세계 가상자산 시장 점유율의 과반 이상을 차지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루 거래액 1조원을 넘긴 거래소들이 여럿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세계 가상자산 거래소 랭킹 최상위권에 국내 거래소들이 나란히 이름을 올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7년 말~2018년 초 △ICO금지 △외국인 투자 금지 △가상자산 거래소 신규 가입자의 은행 계좌 연동 금지 △정부 관계자의 거래소 폐쇄 발언 △가상자산 마진거래의 도박장 개설죄 적용 등의 논란을 거친 이후 국내 가상자산 시장은 관련 법규 없이 수년간 '그레이 존(불법과 합법 여부가 모호한 영역)'에 방치되어 왔습니다. 정부의 부정적인 기조가 이어지며 국내 거래소에서 대규모의 자금이 이탈하는 '엑소더스(집단탈출)' 현상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국내 업계가 크게 위축된 사이 가상자산 시장은 미국, 일본 등을 비롯한 금융 선진국 시장과 기관투자자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해 왔습니다. 난립했던 거래소들 사이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렸고, 몇몇 대형 거래소들 위주로 시장 전체가 빠르게 개편되며 제도화의 길을 걷고 있죠.

가상자산 통계사이트 코인마켓캡닷컴에 따르면 23일 기준 전체 가상자산 시장 거래액은 821억4257만달러(약 92조6934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같은 날 코스피 시장 총 거래액인 10조5292억원의 8.8배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소 잃었는데 외양간까지 잃게 생겼다…"국내 산업 붕괴 막아야"

전세계 1위 거래소로 자리매김한 중국계 거래소 바이낸스(사진=창펑 자오 바이낸스 최고경영자(CEO) 트위터)
전세계 1위 거래소로 자리매김한 중국계 거래소 바이낸스(사진=창펑 자오 바이낸스 최고경영자(CEO) 트위터)
2018년 가상자산 대란 당시 우리나라 거래소보다 낮은 순위에서 뒤따라오고 있었던 중국계 거래소 '바이낸스'와 '후오비'는 지금 세계 랭킹 1, 2위를 다투는 '글로벌 거래소'가 됐습니다. 23일 기준 두 거래소에서 하루 동안 거래된 가상자산은 146억9076만달러(약16조5777억원)입니다. 이는 같은 날 코스피 시장 거래액의 1.6배에 해당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빗썸, 업비트는 같은 날 각각 2926억원, 3955억원의 거래량을 기록했습니다. 과거 바이낸스나 후오비 보다 높은 순위에 올랐던 때와 비교하자면 초라하기 그지없죠.

만약 우리가 대란 당시 가상자산 거래소를 빠르게 제도권화시켜 지금의 바이낸스나 후오비처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단순 거래량만 놓고 비교해도 한국에 코스피 시장 하나가 더 생긴 것과 같은 경제적 효과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하기엔 너무 먼 길을 되돌아 왔습니다. 가상자산 업계의 교통 정리는 거의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었습니다. 시장을 선점한 거래소들이 꾸준히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늘려 나가고 있죠. 국내 시장도 예외는 아닙니다. 당장 국내 거래소들의 모든 규제를 풀어준다고 해도 예전처럼 글로벌 1, 2위를 기록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도 최악의 상황은 아닙니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글로벌 거래소들에 국내 시장이 종속당하는 지경까지 갈 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도 잃었는데 외양간 까지 잃게되는' 상황이 오는 겁니다.

새로운 시장일 수록 '선점'의 위력은 엄청납니다. 독보적인 플랫폼에 익숙해진 이용자들은 좀처럼 다른 플랫폼으로 넘어 오지 않습니다. 애초에 기존 플랫폼보다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더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닌 이상 굳이 사용하던 환경을 바꿀 이유가 없으니까요. 예컨대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플랫폼 대기업들이 아무리 힘을 써도 유튜브나 넷플릭스에 빨려들어간 국내 소비자들을 되찾아오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나마 제대로 된 경쟁을 하려면 선점한 플랫폼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보다 수 십배 이상 돈을 벌고, 그 돈을 재투자 하는 기업을 넘어서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규모의 경제의 측면에서 뒤떨어지고 있는데, 규제 환경조차 뒷받침 되어 주지 못하니 사실상 해외 거래소 종속은 시간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국내 투자자들을 대상으로라도 우리나라 거래소들이 글로벌 거래소 수준의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는 규제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 기사는 10월 25일(03:06) 블록체인·가상자산 정보 플랫폼(앱) '블루밍비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김산하 한경닷컴 기자 sanha@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o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