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고양이는 태어난 직후 눈을 거의 뜨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어미 젖을 용하게 찾아 문다. 본능일까, 이성적 판단일까. 포유류의 이 같은 ‘어미 젖 빨기’ 행동이 눈으로부터 비롯된 고도의 인지적 활동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망막 파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장거리 수평 연결의 모식도
망막 파동으로부터 발생하는 장거리 수평 연결의 모식도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백세범 교수팀은 어린 포유류가 눈을 뜨기 전 ‘망막 파동’이 뇌신경 세포를 자극하고, 이 자극이 뇌 발달에서 중요한 ‘장거리 수평 연결’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21일 발표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눈이 먼저 완성되고 뇌가 그 다음 발달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뇌 구조가 눈을 결정한다는 기존 주류 뇌신경과학의 이론을 완전히 뒤집는 내용이다. 이번 논문은 뇌신경과학 분야 학술지 ‘저널 오브 뉴로사이언스’ 표지논문으로 실렸다.

망막은 눈 안쪽을 둘러싸고 있는 세포막으로 외부 시각정보가 신경세포로 처음 변환되는 영역이다. 망막 파동은 포유류가 태어나기 전 눈의 망막 신경절 세포들이 차례대로 생성되며 파도와 같은 파형으로 확산하는 현상을 말한다.

장거리 수평 연결은 멀리 떨어진 뇌세포들을 결속하는 현상이다. 보통 뇌세포는 150~250마이크로미터(㎛) 거리에서 서로 연결된다. 그런데 1㎜ 이상 떨어진 뇌세포들이 수평 방향으로 강하게 연결될 때가 있다. 장거리 수평 연결은 30여 년 전 발견됐지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백 교수는 “전혀 별개의 메커니즘으로 여겨졌던 망막 파동이 장거리 수평 연결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고 설명했다.

백 교수 연구팀은 다른 연구그룹의 포유류 뇌 연구결과 데이터를 다량 확보했다. 고양이, 마카크원숭이, 페럿(족제비의 일종), 다람쥐 등의 뇌를 실제 광학 장비 등으로 들여다본 이미지 데이터다. 이들 데이터를 방대한 수학적 모델링으로 변환해 연구를 수행했다. 망막 신경망, 망막 파동, 장거리 수평 연결 등과 이들 간 상호작용을 수식으로 만들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했다는 뜻이다.

시뮬레이션 결과로 나타난 시각피질 세포의 장거리 연결 상태 등은 실제로 동물 뇌에서 나타난 연결 상태와 정확히 일치했다. 망막 파동이 장거리 수평 연결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계산과학으로 입증한 것이다.

백 교수는 “추후 황반변성 등 각종 난치성 안질환을 치료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기초 연구성과”라고 말했다. 황반변성은 황반 부위 신경세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퇴화하면서 망막을 망가뜨릴 때 발생한다. 이때 망막에서 관찰되는 각종 신호가 망막 파동과 관계있다는 설명이다.

백 교수는 망막과 뇌의 상호작용으로 새로운 형태의 인공신경망(ANN) 모델을 만드는 후속 연구를 할 계획이다. 아직 망막 등 시신경은 인공지능(AI) 딥러닝 알고리즘 구현에 이용된 적이 없다. 대표적인 알고리즘인 CNN(컨볼루션신경망), RNN(순환신경망), GAN(생성 적대적 신경망) 등은 뇌세포 간 뉴런 작용에만 착안해 발전해왔다. 이번 논문엔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김진우 씨가 제1 저자로 참여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