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조사서 "여론 의식했다" 털어놔…업계 인식 개선해야
게임계 '사상 검증' 피해 반복…정부가 나설 때

한 남성 직장인이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페미니즘을 반대한다'는 글을 올렸다고 가정해 보자.
누군가 이 글을 온라인에 퍼 나르면서 회사 안팎에서 논란이 불거지고, 회사가 남성의 업무 성과물을 모두 삭제한 뒤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남성은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까.

부당한 사유로 업무가 중단됐다며 관할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 해고 구제 신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업무와 무관한 개인의 신념을 SNS상에 밝히는 것은 표현의 자유고, 회사가 개인의 가치관을 문제 삼는 것은 노동권·인권 침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 산업'으로 손꼽히는 게임업계에서는 이처럼 구시대적인 '사상 검증'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효석의 게임인] 반복되는 게임계 '메갈 사냥'…5년간 14명 일자리 잃었다
18일 전국여성노동조합에 따르면, 게임 개발에 참여하던 중 여성권 관련 지지 목소리를 냈다가 부당한 대우를 당한 여성 노동자가 최근 5년 사이에 최소 14명이다.

이들의 직업은 성우, 일러스트레이터, 캐스터, 보컬리스트, 번역자 등이다.

이들은 SNS에 개인적인 신념을 밝혔다가 자신의 작업물을 삭제당하거나 계약이 끊겼다.

페미니즘이든 안티 페미니즘이든 개인의 가치관은 자유다.

특정인이나 불특정 다수에 실제 해를 입힐 우려가 있는 게시글을 올려 현행법을 어긴 혐의가 있다면 경찰에 신고하면 될 문제다.

그런데도 게임사들이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여성 제작자들을 배제하는 이유는 여성권 신장 운동에 극렬히 반대하는 일부 남성 게이머들이 게임 보이콧·불매를 불사하며 게임사에 압력을 넣기 때문이다.

작업물이나 계약을 잃은 14명의 사례를 보면, 안티 페미니스트 게이머들의 집요한 '페미니스트 추적'을 볼 수 있다.

어떤 여성 작업자들은 앞서 사상 검증을 당한 동료를 향해 단순 지지만 표명했는데 게이머들의 공격을 받고 일을 잃었다.

한 개발사는 신작 개발에 참여하는 원화 작가가 과거 사상 검증을 당한 바 있다는 남성 게이머들의 제보·공격이 있자 해당작가의 작업물을 일시적으로 삭제하기도 했다.

[이효석의 게임인] 반복되는 게임계 '메갈 사냥'…5년간 14명 일자리 잃었다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자 대놓고 여성 작가의 사상을 검증하고는 성과를 자랑하듯 게이머들에게 알린 회사들도 있다.

IMC게임즈 김학규 대표는 자사 게임 개발에 참여한 여성 원화 작가가 사상이 의심된다는 게이머들 제보가 있자 작가를 불러 "여성민우회 등 계정은 왜 팔로우했느냐" 등을 질문하고 작가 실명과 징계성 면담 내용을 공개했다.

지난해 '티키타카 스튜디오'도 일러스트레이터 사상을 검증하라는 게이머들 요구가 들어오자 "사회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가 리스트를 찾았다"며 "조금이라도 문제 여지가 있을 시 일러스트를 교체하고, (사상) 검수도 강화하겠다"고 밝혀 비판을 받았다.

왜곡된 인식을 보인 두 회사를 제외하면 나머지 게임사들은 사상 검증 의혹에 관해 '여성 제작자들에게 작업 대가를 지급했으며, 작업물을 사용하지 않거나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것은 사상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국가인권위 차별시정총괄과는 이달 8일 1년여에 걸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게임사들이 사상 검증 피해자들의 작품을 사용하지 않고 피해자들을 배제한 것은 사용자(게이머)들의 퇴출 요구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일부 게임사는 인권위 조사에서 게이머들의 사상 검증 요구가 작업물 교체 이유였다고 시인했다.

다른 게임사들도 '사용자 이탈로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며 게이머 여론을 의식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이효석의 게임인] 반복되는 게임계 '메갈 사냥'…5년간 14명 일자리 잃었다
인권위가 권고한 대로 업계보다는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때다.

인권위는 문화체육관광부에 '게임업계 내 혐오 및 차별에 대한 실태조사를 시행하고, 실태조사 결과에 따라 해당 관행을 개선할 대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문체부는 열흘이 지나도록 답을 내놓지는 않은 상태다.

게임사들도 일부 게이머들의 부당한 요구에 납작 엎드리기보다는 중립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올해 3월 게임사 '클로버게임즈'는 게이머들이 일러스트레이터 사상 검증을 요구하자 "문의하신 내용은 게임과 관련된 문의가 아닌, 각 개인의 사상과 관련된 내용으로 파악돼 공식적인 답변이 어렵다.

특정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에 일체 반대한다"고 답변해 모범 사례를 남겼다.

인권위 결정문의 한 단락은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 나가도록 국민 혈세를 더 지원해달라고 요구하는 게임업계가 필독할 만하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은 그 기업의 주요한 고객이라고 할 수 있는 소비자가 추구하는 가치에 동조하기 마련이며, 때로는 그 과정에서 종사자의 가치와 소비자의 가치가 충돌할 때 소비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경영상 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업도 사회의 일원이고 기업의 이윤 또한 사회로부터 창출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소비자의 요구가 인권·정의와 같은 기본적 가치에서 이반된 것이라면 이를 무시하거나 소비자를 설득하는 것이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모습일 것이다.

'

[※ 편집자 주 = 게임인은 게임과 사람(人), 게임 속(in) 이야기를 다루는 공간입니다.

게임이 현실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두루 다루겠습니다.

모바일·PC뿐 아니라 콘솔·인디 게임도 살피겠습니다.

한국 게임 산업을 게임 애호가의 관점으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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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