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정보기술(IT)의 바다는 역동적입니다. 감탄을 자아내는 신기술이 밀물처럼 밀려오지만 어렵고 생소한 개념이 넘실대는 통에 깊이 다가서기 어렵습니다. 독자들의 보다 즐거운 탐험을 위해 IT의 바다 한가운데서 매주 생생한 '텔레파시'를 전하겠습니다.
지난 3월 30일 대전여성단체연합 관계자들이 대전지방검찰청 앞에서 성 착취 동영상 유포 사건인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지난 3월 30일 대전여성단체연합 관계자들이 대전지방검찰청 앞에서 성 착취 동영상 유포 사건인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졸속 개정, 사찰 논란에 휩싸인 'n번방 방지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오른다. n번방 근원지인 텔레그램 대신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기업들만 규제 역풍을 맞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20대 국회 막차에 올라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20일 정치권과 정보기술(IT)업계에 따르면 n번방 성착취 사건 재발 방지 방안을 담은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이날 오후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다.

개정안의 핵심은 인터넷 사업자에 불법 음란물 삭제와 관련 접속을 차단하도록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 3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며 사업을 폐지할 수도 있다.

n번방 사태 재발을 막으려는 취지지만 정작 n번방의 무대가 된 텔레그램은 규제할 수 없다는 맹점이 있다. 구글, 페이스북과 달리 텔레그램은 국내 법인이 없는 탓. 설령 국내 법인이 있다 해도 해외 기업들 협력을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개정안에 "국외에서 이뤄진 행위도 국내 시장 또는 이용자에게 영향을 미칠 경우 이 법을 적용한다"는 역외규정을 넣었다. 하지만 텔레그램처럼 본사 소재조차 불명확한 해외 업체를 당국이 규제·감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기업들이 받는 규제 부담만 가중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IT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은 불법·유해 콘텐츠 게시와 유통을 비교적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불법 촬영물이 해외 메신저를 통해 공유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지금도 텔레그램에서는 n번방과 유사한 대화방들이 운영된다는데 텔레그램은 두고 국내 업체들만 잡는 개정안은 실효성이 없지 않겠느냐"고 꼬집었다.
지난 4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제337회 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재적 290인, 재석 189인, 찬성 189인으로 통과하고 있다.사진=뉴스1
지난 4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제337회 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재적 290인, 재석 189인, 찬성 189인으로 통과하고 있다.사진=뉴스1
국내 기업 역차별 문제뿐 아니라 n번방 방지법은 논의 초기부터 사적 검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업계와 시민단체는 인터넷 사업자가 음란물 감시 명목으로 이용자 게시물을 들여다보는 것이 개인의 사생활은 물론이고 표현의 자유, 통신비밀 보호 등 헌법적 가치를 침해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n번방에 판을 깔아준 텔레그램은 빠지고 국내 기업들만 '불법 사찰' 논란에 휘말릴 것이란 얘기다. 일각에서는 2014년 카카오톡 검열 논란으로 불거졌던 '사이버 망명'이 개정안 통과 후 재현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방통위는 n번방 방지법이 일반에 공개된 게시판이나 대화방을 대상으로 할 뿐, 개인 간 사적 대화를 규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방통위 해명에도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충분한 의견 수렴과 논의를 거치지 않은 졸속 입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지난 17일 민생경제연구소·사단법인 오픈넷·소비자시민모임·참여연대·한국소비자연맹·코리아스타트업포럼은 n번방 방지법을 포함한 '방송통신3법' 졸속 추진을 중단하라는 공동의견서를 국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통위에 전달했다.

이들은 "n번방 사태 이후 쏟아지는 법안들이 산업계를 옥죄는 규제를 담고 있음에도 국회는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입법을 졸속 추진했다"며 "다음 국회에서 충분한 공론화와 의견수렴, 논의를 거쳐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은지 한경닷컴 기자 eunin1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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