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치료 길 열리나

DGIST의 한국뇌연구원
공포기억 떠올리게 하는 영역 발견
한국뇌연구원의 구자욱 책임연구원(왼쪽)과 이석원 선임연구원이 공포기억 재발을 억제한 생쥐의 뇌조직에서 DNA를 추출하고 있다.  /뇌연구원 제공

한국뇌연구원의 구자욱 책임연구원(왼쪽)과 이석원 선임연구원이 공포기억 재발을 억제한 생쥐의 뇌조직에서 DNA를 추출하고 있다. /뇌연구원 제공

행복한 기억이 깃든 장소를 떠올려 보자. 언제나 찾고 싶은 장소일 것이다. 반대로 불쾌했던 장소를 떠올려 보자. 비슷한 곳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이다. 고통스러웠던 과거 기억이 특정 조건에서 되살아나는 트라우마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장소 선호나 혐오는 단순히 감정적 충동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에 가깝다. 과학적으로 보면 모두 뇌의 특정 영역이 지배하는 메커니즘이다.

‘모르핀’은 결합 부위가 있다

특정 장소와 기억 등에 대한 집착은 마약 중독 과정과 비슷하다. 뇌 안에는 중독성 물질이 결합되는 장소인 ‘오피오이드(opioid) 수용체’가 있다. 행복감을 유발하는 신경호르몬 엔도르핀, 마약성 진통제 모르핀 등이 이곳에 달라붙는다. 엔도르핀, 모르핀 등을 통칭하는 오피오이드는 ‘아편(opium)’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연인과 함께 갔던 데이트 장소를 찾으면 감정이 들썩이는 것은 데이트 당시 오피오이드가 분비됐던 경험을 뇌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든 안 좋든 기억은 대뇌 변연계의 일부분인 해마에서 이를 관장한다. 해마는 장기 기억과 감정 조절, 학습 등에 관여한다. 오피오이드는 이런 해마 별세포의 뮤-오피오이드 수용체에 결합해 ‘행복 장소’에 대한 선호 기억을 만든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교세포과학그룹과 경북대, 한국과학기술원(KIST) 공동 연구팀이 28일 내놓은 연구 결과다. 별세포는 뇌에서 가장 많이 존재하는 별 모양의 비신경세포다. 뮤-오피오이드 수용체는 모르핀, 베타엔도르핀, 엔케팔린 등이 달라붙는 수용체다.

연구팀은 2개의 방(A, B)에서 쥐가 자유롭게 오가도록 한 뒤 선호하는(오래 머무르는) 방 A를 파악했다. 이후 비선호하는 방 B에 있을 때 해마 별세포 뮤-오피오이드 수용체에 작용하는 모르핀을 주사했다. 쥐는 이 주사를 맞자마자 비선호했던 방(B)에 A보다 오래 머무르는 현상이 관찰됐다.

연구팀의 설명은 이렇다. 모르핀이 들어오는 순간, 별세포에서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가 방출됐다. 이것이 해마 ‘시냅스’(사람으로 치면 전통 시장 내 인간관계) 내 신경세포 간 신호 전달을 활발하게 하면서 B에 대한 새로운 선호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해마 시냅스 내 신호 전달이 증폭되면서 ‘새로운 애착’이 생겼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장기 강화’라고 부른다.

연구팀 관계자는 “공포 회피 등 감정과 달리 행복을 유발하는 뇌 메커니즘은 아직까지 많은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행복, 좋아하는 감정뿐 아니라 사랑이란 감정이 생기는 이유를 뇌 차원에서 파악하는 쪽으로 연구를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끔찍한 기억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환자들은 사건 발생 장소와 비슷한 곳에만 가더라도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세월호 참사, 대구 지하철 화재 등 큰 재난을 겪은 당사자들이 배 지하철 등을 못 타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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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부설 한국뇌연구원의 구자욱·이석원 연구원은 이 같은 ‘공포 기억’이 재발하는 데 대뇌 후두정피질(PPC: posterior parietal cortex)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후두정피질은 뇌 뒤쪽 정수리에 있는 두정엽의 일부로 공간적 추론, 의사결정 등 고차원적 인지기능에 관여한다.

연구팀은 쥐 두 마리에게 특정 소리를 들려준 뒤 전기충격을 가했다. 개에게 종소리를 들려준 뒤 음식을 주고 종소리만으로 침이 분비되는지 확인하는 ‘파블로프의 개’ 조건화 학습이다. 이들 쥐는 다른 장소로 옮겨서도 특정 소리를 듣자 공포반응을 보였다. 활발히 움직이던 쥐가 소리를 듣자마자 미동도 없이 얼어붙는 행동이 관찰됐다.

연구팀은 이 중 쥐 한 마리의 후두정피질에 ‘무시몰’이라는 화합물을 넣었다. 뇌과학 연구에서 흔히 사용되는 뇌 특정 영역 비활성화 약물이다. 또 빛에 반응해 세포 비활성화를 유도하는 단백질 ‘할로로돕신’을 넣고 빛을 쬐게 했다.

후두정피질에 무시몰과 할로로돕신을 투여받은 쥐는 트라우마가 관찰되지 않았다. 새로운 장소에서 특정 소리를 들어도 얼어붙는 공포반응이 전혀 없이 자유롭게 활동했다.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구 연구원은 “그동안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던 후두정피질의 역할을 새로 규명했다”며 “PTSD 또는 공포증 환자 치료전략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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