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 스타트업이 안 보인다
(1) 벤처 붐에도 '찬밥 신세'

올 벤처투자 사상 최대라지만
기술기업엔 겨우 10% 들어가
'테크 유니콘'은 한 곳도 없어
벤처투자액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정도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투자 열기가 뜨겁지만 기술 기반의 테크 스타트업은 소외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8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글로벌 스타트업 페스티벌 ‘컴업 2019’ 현장.  /연합뉴스

벤처투자액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할 정도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투자 열기가 뜨겁지만 기술 기반의 테크 스타트업은 소외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28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글로벌 스타트업 페스티벌 ‘컴업 2019’ 현장. /연합뉴스

“창업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대박을 기대하지 말라’고 해요. 한국에선 살아남는 것만도 만만찮거든요.”

팹리스(반도체 설계)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의 박모 대표는 남부럽지 않은 경력의 소유자다. 미국 유명 대학 경영학석사(MBA) 출신에 국내 대기업 반도체개발팀에서 일했다. 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앞세워 야심 차게 창업전선에 뛰어든 지 5년째, 그는 ‘기술창업 회의론자’가 됐다.

한국에서 신기술 기반의 테크 스타트업 생태계가 메말라가고 있다. 1일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10월까지 1333개 스타트업에 3조5249억원이 투자됐다. 지난해 투자 규모를 넘는 사상 최대다.

이 중 테크 스타트업(정보통신기술 제조, 전기·기계·장비, 화학·소재 분야) 투자액은 3584억원으로 10.2%에 불과하다. 투자 비중이 2015년(21.8%)의 반 토막으로 쪼그라들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에 가입한 회원사 1141곳 가운데 제조기술 회원사는 46곳으로 0.4%뿐이다.

美·中 테크 스타트업 '메가투자' 10兆 쏠리는데…韓은 고작 3500억

국내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 열 곳 중 테크 스타트업은 단 한 곳도 없다. 유니콘기업 보유 상위 5개국 가운데 테크 스타트업이 없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미국 유니콘기업 207곳 중 55곳, 중국 109곳 중 29곳이 테크 스타트업이다. 6개 유니콘기업이 있는 이스라엘은 4개가 테크 스타트업이다.

국내 벤처캐피털(VC) 등 투자자는 초기 투자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테크 스타트업을 홀대한다. 대기업은 문어발 확장이라는 비판적 여론과 규제로 테크 스타트업 인수합병(M&A)에 소극적이다. M&A 저조로 투자자금 회수가 어려우니 또 다른 창업과 투자 의욕이 꺾이는 구조다.


올 벤처 투자액 3.5兆 중
'테크기업' 비중 10% 그쳐


“삼성전자 등 대기업에 있는 친구들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면 ‘성공 사례가 없어 용기가 안 난다’는 답이 돌아와요. 기술 인재들이 창업을 두려워한다는 게 제일 큰 문제죠.” (클라우드 장비 개발 스타트업 B사 대표)

신기술 기반의 테크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생태계만 떼놓고 보면 한국은 ‘기술강국’이 아니다. ‘딥테크(기저기술)’를 기치로 내걸고 테크 스타트업 육성에 열을 올리고 있는 주요국과 비교된다. 정부도, 시장도 기술 스타트업에는 관심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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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벤처 투자액 역대 최대지만…

국내 전문가들도 테크 스타트업의 중요성에 동의한다. 자율주행자동차의 ‘눈’ 역할을 하는 라이다(LiDAR) 센서칩을 개발해 인텔로 153억달러(약 17조원)에 팔린 이스라엘의 모빌아이, 인공지능(AI) 기술 기반 앱(응용프로그램) ‘틱톡’으로 페이스북을 긴장시키고 있는 중국의 바이트댄스 등 세계 곳곳에서 성공 사례가 등장하고 있어서다.

박희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성장 한계를 마주한 한국 경제의 돌파구는 테크 스타트업밖에 없다”며 “거대 공룡이 돼버린 대기업보다 날렵하게 새로운 시장을 파고들 수 있는 테크 스타트업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테크 스타트업은 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고 완제품을 내놓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일단 궤도에 오르면 온라인 중개 등 서비스형 스타트업보다 글로벌 시장 진출이 쉽다. 기술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없기 때문이다.

고용창출 효과도 크다. 연구개발(R&D) 작업이 만만찮은 데다 생산 관련 인력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업을 담당하는 최고경영자(CEO)와 앱을 개발하는 최고기술책임자(CTO)만으로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서비스 스타트업과 구분되는 대목이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테크 스타트업은 ‘미운 오리새끼’ 신세다.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의 20~30%가 테크 스타트업인 미국, 중국과 달리 한국엔 테크 스타트업 유니콘이 전무하다. 올 들어 10월까지 신규 벤처투자액이 3조5249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지만 테크 스타트업에 흘러들어간 돈은 이 중 10.2%에 불과했다.

초기비용 크다며 ‘메가투자’ 꺼려

벤처캐피털(VC)은 초기비용이 부담된다는 이유로 테크 스타트업 투자에 인색하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같은 조건이면 테크 스타트업을 피하려고 하는 정서가 있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에는 5000만원 안팎이면 반도체 칩 하나를 생산할 수 있었다. 초기자본 1억원이면 팹리스(반도체 설계기업) 창업에 도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반도체 스타트업이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려면 초기자본으로 최소 100억원이 필요하다. 팹리스 업체에서 개발에 필요한 설계자산(IP)을 구입하는 데만 60억원 안팎이 든다.

최근 한 반도체 스타트업이 첫 단계 투자로 100억원을 유치해 화제가 됐다. 반도체업계에선 “그것으로 부족할 텐데”라는 말이 돌았다. 우수한 인력과 대규모 자금이 선순환하는 생태계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테크 스타트업이 성장하기 힘들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그러나 한국 벤처투자 시장엔 테크 스타트업을 도와줄 조력자가 많지 않다. 미국과 중국에서 1억달러(약 1178억원) 이상 특정 업체에 집중투자하는 ‘메가투자’가 늘어나는 것과 대조적이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에서 이뤄진 스타트업 투자액의 51%(410건)인 1201억달러(약 141조7180억원)가 메가투자였다. 이 가운데 80% 이상을 미국과 중국 스타트업이 유치했다. 미국의 테크 스타트업 8개가 총 17억4000만달러(약 2조532억원), 중국의 테크 스타트업 16개가 60억2000만달러(약 7조1036억 원)의 메가투자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우아한형제들, 쿠팡 정도만 메가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같이 서비스형 스타트업이다.

■ 테크 스타트업

신기술 기반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신생 벤처기업. 전자상거래 등 서비스형 스타트업과 구분된다. 최근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 4차 산업혁명 분야의 기술을 개발하는 테크 스타트업이 주목받고 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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