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탐구

M&A·외부 지재권 활용 없이
'독자 콘텐츠'로 승부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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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의 재미는 오브젝트(게임 내 사물이나 캐릭터) 간 충돌에서 커집니다. 이번에는 모바일에서도 구현해야 합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리니지2M’ 게임 개발 초기 실무진에게 당부한 말이다. 게임 내 캐릭터나 사물 간 충돌효과는 전투와 전략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캐릭터끼리 부딪치거나 사물과 부딪치면 현실 세계에서처럼 나뒹굴어야 쾌감이 더해진다. 통과해버리면 게임의 재미가 떨어진다. PC MMORPG에서는 이런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게임업계가 내놓은 모바일 3차원(3D) MMORPG들은 충돌효과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모바일 플랫폼에서 충돌 처리는 고난도 그래픽 구현과 데이터 처리 기술이 필요하다. 그동안 국내외 업체들이 포기한 이유다.

여전히 실무개발자들과 호흡 맞춰

김 대표는 1997년 엔씨소프트를 창업한 이후 ‘현역 개발자’로 활약하고 있다. 리니지2M의 충돌효과 구현 주문은 자신에게 내린 ‘중대 미션’이기도 했다. 이 게임을 구상한 뒤 제작을 결정하면서 개발 원칙을 정했다. “기본적으로 원작인 PC 게임 ‘리니지2’가 남긴 의미와 가치를 모바일 플랫폼에서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개발자 김 대표의 의지와 아이디어로 리니지2M은 충돌효과를 구현했다. 인공지능(AI)까지 적용돼 게임 내 괴물은 이용자의 실력과 상황에 따라 반응한다. 김 대표는 “단언컨대 몇 년 동안은 기술적으로 (어떤 게임도 리니지2M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공을 들인 만큼 리니지2M은 게임업계 최고 기대작으로 꼽힌다. 사전 예약을 받은 지 32일 만에 예약자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

국내 게임업계에서 엔씨소프트의 입지는 독특하다. 자체 개발한 게임이 주력이다. 인기 게임을 개발한 게임사를 인수하면서 회사를 키우지 않았다. 외부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걸려도 엔씨소프트가 개발하고 키운 IP로 승부를 걸었다. 그것도 모두 MMORPG라는 하나의 게임 장르에 집중했다. 다른 게임업체들이 외부 게임을 유통하거나 다양한 장르로 수익을 다각화할 때 엔씨소프트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리니지, 아이온, 블레이드앤소울 등 엔씨소프트가 연이어 내놓은 게임이 모두 흥행에 성공한 배경 중 하나다. 창업한 지 12년 만인 2009년 연간 매출 5000억원을 넘어섰다.

조직 개편으로 최대 위기 돌파해

급성장하던 엔씨소프트가 주춤거렸다. 2012년 처음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아 400명(전체 직원의 14%)이 회사를 떠났다. 매출은 한동안(2011~2015년) 7000억~8000억원대에 머물렀다. 신작 게임을 출시하지 못한 탓이 컸다. 국내 게임시장의 주류로 떠오른 모바일 게임에 대한 대응이 늦었다. 모바일 게임을 앞세운 넷마블의 매출은 2015년 엔씨소프트를 추월했다.

김 대표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게임개발 실무자들이 예산 집행, 인력 채용 등을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조직을 개편했다. 이전에는 모든 게임 개발 과정이 임원을 거쳐 김 대표에게 보고됐다. 전형적인 피라미드 구조였다. 조직 개편에 따라 캠프 책임자가 김 대표에게 보고하고 주요 사항도 바로 결정했다. 이전보다 조직체계가 가벼워져 개발 속도가 빨라졌다.

성과는 단기간에 나타났다. 조직 개편 후 내놓은 모바일 게임 ‘리니지 레드나이츠’가 국내 모바일 게임 매출 1위에 올랐다. 이듬해인 2017년 6월 출시된 모바일 게임 ‘리니지M’은 대박을 터뜨렸다. 이 게임은 출시 이후 국내 매출 1위(안드로이드 스마트폰 기준)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모바일 게임이 잇달아 성공해 엔씨소프트의 실적은 크게 뛰었다. 2017년 매출이 전년보다 79% 증가한 1조7587억원을 기록했다.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다.

경기 성남시 판교 사옥의 공식 명칭은 아예 엔씨소프트R&D센터다. 연구개발비는 2015년 1541억원에서 지난해 2555억원으로 급증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이 글로벌 1000대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 현황을 분석한 결과, 2017년 기준 엔씨소프트의 매출 대비 R&D 투자 비율은 16.2%로 세계 498위였다. 국내에서는 1위였다.

업계 목소리 대변하는 맏형

김 대표가 국내 게임업계에서 특별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국내 정보기술(IT)산업을 개척한 1세대 벤처 창업가 중 김 대표만 유일하게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22년째 엔씨소프트를 전면에서 이끌고 있다. 김 대표는 평소 직원들에게 “창업자로서 회사에 있는 한 가장 큰 역할과 권한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 맞는 역할과 책임도 다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2017년 12월부터는 최고창의력책임자(CCO·chief creative officer)까지 맡았다. 게임 개발을 총괄하면서 AI 등 신기술과 새로운 성장동력을 직접 챙기기 위해서다. 2011년부터 직속으로 AI R&D 조직도 운영하고 있다. 익명 채팅창으로 직원들이 실시간 질문하면 김 대표가 바로 대답하는 시간도 가진다.

그는 올 들어서 국내 게임업계의 목소리를 내는 맏형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1월과 2월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하는 기업인 간담회에 참석했다.

김 대표는 문 대통령에게 “다른 나라는 자국 기업을 보호하려고 더 강고한 울타리를 세워 타국 기업 진입이 어렵지만 우리는 거꾸로 해외 기업이 들어오는 것은 쉽고 한국 기업이 보호받기는 어렵다”며 “정부가 조금 더 스마트해지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지난 8일 엔씨소프트를 찾은 국회의원들에게는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으로) 생산성이 떨어진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지가 최대 과제”라며 게임업계의 우려를 전했다.

그렇다고 국내에 안주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엔씨소프트는 전체 매출의 70% 이상이 국내에서 발생한다. 경쟁업체인 넥슨과 넷마블에 비하면 국내 비중이 상당히 높다. 김 대표는 올 5월 리니지M을 일본에 내놓고 현지에서 상황을 점검했다. 국내에서처럼 인기를 끌지 못했다. 올해 출시되는 리니지2M을 앞세워 해외 모바일 게임시장에 다시 도전할 계획이다.

■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프로필

△1967년 서울 출생
△1989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한글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 공동 개발, 한메소프트 설립(한메한글, 한메타자교사 개발)
△1991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석사, 현대전자 보스턴 R&D센터 연구원
△1995년 현대전자 인터넷온라인서비스 아미넷 개발팀장
△1997년 엔씨소프트 설립(대표)
△2011년~ 프로야구 NC 다이노스 구단주 △2018년~ 한국공학한림원 회원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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