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하면 두 가지 좋은 점이 있죠. 첫째는 성공을 도와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둘째는 성공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겁니다.”(이수인 에누마 대표)

미국 실리콘밸리는 혁신의 산실이자 인재의 집결지다. 세계 각국에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몰려 상품과 서비스를 선보이며 승부를 벌인다. 멋지고 화려해 보이지만, 수많은 벤처가 실패하고 쓴맛을 보는 ‘정글’이다.

이런 실리콘밸리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국인 여성 창업자가 늘고 있다. 유아교육 앱(응용프로그램)을 개발해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수인 대표, 경력단절 여성을 도와주는 비영리기업 심플스텝스를 차린 김도연 대표, 스탠퍼드대 교수로 뇌질환 진단 기술을 개발 중인 이진형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주한미국대사관 초청으로 지난 6~7일 방문한 실리콘밸리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실리콘밸리서 성공한 韓人 여성들 "실패하더라도 좋은 평판 남겨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실리콘밸리 생태계”

이수인 대표와 남편 이건호 씨는 모두 국내 게임회사 엔씨소프트 출신이다. 이 대표는 10년 전 남편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버클리대에서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첫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아이를 위해 특기를 살렸다. 일반 학생뿐만 아니라 장애가 있는 어린이도 게임 방식으로 읽고 쓰며 기본적인 셈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이 대표의 팀이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선보인 앱 ‘킷킷스쿨’은 지난달 머스크 등이 인류 문맹 퇴치를 위해 주최한 세계 최대 비영리 경진대회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에서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상금만 500만달러(약 59억원)였다. 이 대표는 자신을 “실리콘밸리의 장점을 모두 누리기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고, 여성이고, 유색인인 데다 공대가 아니라 미대를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나 같은 사람도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기회를 주는 포용력이 큰 곳”이라고 실리콘밸리를 평가했다.

실리콘밸리는 ‘신뢰’를 기반으로 자원을 배분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리콘밸리가 실패에 관대하다는 건 ‘잘’ 실패한 사람을 받아준다는 뜻이지, 잘못 실패한 사람도 계속 받아준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그는 “창업자가 최선을 다한 끝에 맞는 실패를 실리콘밸리는 소중한 자산으로 인정해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회사 청산 과정에서도 자기 몫을 챙기기보다 다른 주주들을 존중했다는 평판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비영리기업에도 우호적인 분위기”

비영리기업 심플스텝스를 운영하는 김도연 대표는 실리콘밸리에서 주목받는 한인 여성이다. 고국에서 하던 일을 관두고 미국에 건너온 경력단절 여성에게 다시 일자리를 연결해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KAIST에서 생명공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그는 남편의 유학길을 따라 2007년 미국에 왔다. 하버드대 석사 등을 거치면서 자신처럼 가족과 함께 미국에 건너오느라 경력이 단절된 한인 여성들을 돕겠다는 꿈을 키웠다. 2017년 창업한 심플스텝스가 그 발판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선 인맥 없이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요. 연고가 없다는 이유로 최저임금을 주는 비정규직 일자리밖에 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경력단절 여성을 위해 일자리를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다수의 작은 소모임을 조직해 2년에 걸쳐 600여 명 규모의 구인-구직자 네트워크를 개발했다. 이 가운데 280여 명의 구직자가 각종 세미나 등 네트워킹 행사에 참여했고, 160여 명에게 커리어 워크숍을 제공했다. 좋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50명 미만 소규모 스타트업이 주요 공략 대상이다.

지금껏 자원봉사만으로 성과를 내왔다. 김 대표는 “이제야 월 1000달러를 급여로 가져갈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는 “실리콘밸리라고 해서 비영리기업에도 자금을 퍼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시작해볼 분위기는 조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10년간 구직자 군을 대폭 늘려 한국인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 여성의 끊어진 경력을 이어주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자금 지원 후에도 간섭보다는 존중”

이진형 교수는 스탠퍼드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일하며 간질 등 뇌질환 진단을 도와주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석사 때까지 전기공학을 전공했지만 박사과정 이후 생명과학 및 뇌과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미국 정부의 미 국립보건원(NIH)으로부터 5년간 15억원가량의 투자 지원(펀딩)을 받았다. 지난해 실리콘밸리 내 팰로앨토와 서울 서초동에 회사를 차렸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이 교수는 “NIH는 정부기관이지만 그 어느 민간기업보다 유연하게 자금을 지원한다”고 소개했다. NIH의 선정위원회는 민간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이 위원회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 연구 진행 상황은 한 장짜리 보고서로 대체된다. 이것이 “신뢰를 받고 그 신뢰에 책임을 지는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단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실리콘밸리에서 살아남은 비결을 묻자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미국도 마찬가지죠. 여성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는 직원들,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환경이 변해야 하지만 여성 스스로도 바뀌어야 합니다. 차별이 존재하는 건 인정하지만 나는 차별받는 계층이라는 점만 강조해선 곤란합니다.”

실리콘밸리=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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