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업계에 ‘뉴트로(newtro)’ 바람이 불고 있다. 뉴트로는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다. 과거 유행한 디자인이나 제품이 다시 인기를 끄는 복고와 달리 옛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소비하는 문화를 뜻한다. 뉴트로가 ‘핫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패션, 인테리어, 식음료 업계는 아날로그 감성을 덧입힌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제약업계도 가세했다. 예전에 인기를 끌었다가 단종된 ‘명약(名藥)’들이 제형이나 이름을 바꿔 다시 출시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신제품을 개발하기 어려운 국내 제약사들이 침체된 일반의약품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엄마가 먹던 '그때 그 약'이 돌아왔다
옛날 약의 귀환

지난달 JW중외제약은 임신 빈혈약으로 인기를 끌었던 철분제 ‘훼럼’을 ‘훼럼포유’로 재출시했다. 1976년 출시된 훼럼은 1999년 연 매출 40억원을 돌파한 이후 연 30억원의 매출을 유지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들어 철분이 포함된 다양한 건강기능식품이 출시됐고 정부가 임신부에게 철분제를 무료로 보급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결국 알약 형태의 ‘훼럼 플러스’는 2012년, 액상형인 ‘훼럼 메이트’는 2015년 판매가 중단됐다. JW중외제약은 노산이 늘면서 고함량 철분제의 수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4년 만에 훼럼을 다시 선보였다. 철분제 특유의 비린 맛과 냄새를 없애기 위해 말랑한 연질캡슐로 만들고 하루 한 알로 100㎎의 철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높였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영유아용 정장제로 유명했던 ‘미야리산’도 지난달부터 약국에 다시 등장했다. 일본에서 개발된 미야리산은 1983년 청계약품이 국내에 들여와 연 100억원대 매출을 올리면서 히트 상품이 됐다. 2007년 한독이 판권을 인수하면서 2015년까지 강미야리산정으로 독점 판매했지만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에 밀려 시장에서 철수했다. 이번에 ‘미야리산U’를 출시한 신신제약은 낙산균의 일종인 미야리산으로 유산균과 차별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신신제약 관계자는 “낙산균은 위산, 항생제에도 생존력이 뛰어나 기존에 유산균으로 효과를 보지 못한 소비자를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오는 9월에는 1980년대 수험생들의 졸음 방지약의 대명사였던 ‘타이밍정’이 다시 판매될 예정이다. 1993년에 단종된 지 26년 만이다. 타이밍정은 카페인무수물 성분으로 각성 효과가 있는 일반의약품이다. 방직 노동자들이 야간 작업을 할 때 복용했던 약으로, 전태일기념관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타이밍정을 내놨던 크라운제약이 사명을 지엘파마로 변경하고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재허가를 받았다. 커피보다 이뇨 작용이 덜하고 물을 많이 섭취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 야간 운전을 해야 하는 운송업 종사자나 직장인이 주요 타깃이다.

우려먹기 지적도

제약사들이 옛날 의약품을 다시 불러들이는 이유는 적은 투자로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과거의 명성만으로 매출을 쉽게 올릴 수 있다. 광동제약은 지난해 6월 ‘솔청수’를 재출시해 월간 판매량 70만 병을 돌파했다. 성분을 변경하거나 새로 제품을 개발하지 않고 파산한 조선무약의 ‘솔표’ 상표권을 그대로 가져와 성공을 거뒀다. 최근 재출시되는 제품들도 대중 인지도가 높은 일반의약품이다. 중장년층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지갑을 열게 하는 효과도 있다. 훼럼이나 미야리산은 당대 인기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기용해 소비자들에게 친숙하다. 방송인 최화정이 철갑옷을 입고 ‘철의 여인’을 외치던 훼럼 광고나 가수 노사연이 아이와 함께 출연한 미야리산 광고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과거 인기를 끌었던 제품인 만큼 신제품에 비해 위험 부담이 적다는 것도 이유로 꼽힌다.

하지만 이들 제품은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대응하지 못해 실패의 쓴맛을 봤다는 공통점이 있다. 제약사들은 옛날 의약품이 젊은 층에는 생소한 신제품인 만큼 새로운 소비자층을 공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과거 소비자들에게 외면받고 쫓겨났던 이유를 분석해 제품을 개량하거나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소비층을 찾아낸다면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신제품 개발에 투자하지 않고 기존 제품 ‘우려먹기’에 급급한 국내 제약사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일반의약품은 사용할 수 있는 성분이 제한돼 있어 새로운 제품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일반의약품 허가는 2011년 1만6817개에서 2015년 1만4892개로 줄었고 생산액도 2조5500억원에서 2조4800억원으로 감소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일반약 제조와 성분 규제를 완화해 다양한 제품이 나올 수 있게 길을 터줘야 한다”고 말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