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하나둘 한국을 떠나고 있다. 8일(현지시간) 막을 올린 세계 최대 전자쇼 ‘CES 2019’에서 이 같은 스타트업을 만나볼 수 있었다. 국내의 촘촘한 그물망 규제에 질려 미국 등 해외에서 살길을 찾고 있었다.

CES에 韓 블록체인 기업 2개 그쳐

韓 의료기기 허가에 3년, 美 반년이면 유통…'규제 코리아' 떠날 수밖에
이는 CES를 주최한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 통계에서 잘 드러난다. 블록체인(분산저장 거래시스템) 기술을 들고 CES에 참가한 기업 38개 중 한국 기업은 위즈블과 창대테크 2곳에 불과했다. 프랑스가 10개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미국(8개)이 이었다.

블록체인은 올해 CES 측이 처음 주요 주제로 삼을 정도로 주목받는 기술이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차세대 먹거리로 꼽힌다. 최광길 위즈블 매니저는 “한국 정부가 블록체인 관련 규제를 좀 더 개선하고 지원도 많이 했다면 더 많은 한국 업체가 CES에 참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즈블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규제가 덜한 싱가포르에 법인을 설립할 계획이다. 프랑스는 한국에서 여전히 논란 중인 가상화폐공개(ICO)를 지난해 9월부터 허용하고 있다.

규제 때문에 해외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스타트업도 늘고 있다. 헬스케어 스타트업이 대표적이다. 올리브헬스케어플랫폼은 자체 개발한 복부지방량 측정기를 한국에서 출시하려다 무기한 연기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허가 신청을 내고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아마존을 통해 판매할 계획이다.

그럴 만도 하다. 지난해 컨설팅업체 삼정KPMG가 글로벌 투자 상위 100대 헬스케어 스타트업을 설문조사한 결과 63곳이 ‘한국에서는 사업하기 힘들다’고 응답했다. 원격의료 금지, 빅데이터 규제 등이 이들 기업이 꼽은 어려움이었다.

또 국내에서 의료기기를 출시하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고도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신의료기술평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급여 여부 평가를 추가로 거쳐야 한다.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않는 비급여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제품 개발 후 출시까지 1년도 안 걸리지만 국내에서는 2~3년 넘게 소요되는 경우가 많다.

겹겹 규제로 ‘코리아 패싱’

국내 최초로 도심 자율주행차량 ‘스누버’를 개발한 스타트업 토르드라이브도 규제를 피해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도로교통법, 자동차관리법 등 온갖 규제에 발목을 잡혀 사업이 불가능했다. 카풀, 우버 등 차량 공유 서비스가 사실상 금지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6일 이마트와 자율주행 배송서비스를 위한 시범운영 계약을 맺었지만 자율주행 규제 완화가 없다면 상용화가 불투명하다.

계동경 토르드라이브 대표는 “미국 텍사스, 애리조나주에서는 미 식료품업체인 크로거가 세계 최초로 자율주행 배송을 시작하는 등 상업적 자율주행 서비스를 이미 제공하고 있다”며 한국의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을 전했다.

지난해 3월 삼정KPMG가 내놓은 ‘자율주행차 준비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자율주행차 법규와 제도 순위가 전체 조사대상 20개 국가 중 14위로 하위권이었다.

투자에 소극적인 자세와 우수 인력난도 자율주행기술 개발 스타트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암초라는 게 토르드라이브 측의 설명이다. 대학 연구실적을 바탕으로 창업해(스핀오프) 차별화한 기술력을 확보했으나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는 이유로 대규모 투자를 받기 어려웠다. 자율주행기술 개발 경험이 있는 소수 인재는 스타트업 대신 대기업 등 안정적인 직장을 택했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미국 프랑스 중국 등 다른 국가는 스타트업에 단순히 돈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종 규제도 혁파한다”며 “이들 국가 스타트업은 매년 특출난 첨단기술과 서비스를 갖추고 CES에 참가해 놀랍다”고 전했다.

라스베이거스=김주완/임유/장현주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