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광풍 1년
(2) 가이드라인 없는 ICO

작년 "ICO 전면 금지하겠다"던 정부
전수조사까지 해놓고 규제 지침 안내놔
플랫폼·사업모델 가진 개발사 포기 속출

메디토큰 등 국내 가상화폐 50여개
스위스·싱가포르·홍콩 등 해외로 진출
"ICO 허용하되 네거티브 규제는 필요"
가상화폐 하이콘을 개발한 글로스퍼가 지난 14일 서울 화곡동 KBS아레나에서 연 해커톤 행사 ‘하이콘핵스’에서 참가자들이 해킹 경연을 하고 있다.  /글로스퍼 제공

가상화폐 하이콘을 개발한 글로스퍼가 지난 14일 서울 화곡동 KBS아레나에서 연 해커톤 행사 ‘하이콘핵스’에서 참가자들이 해킹 경연을 하고 있다. /글로스퍼 제공

대형 유통기업 지주사인 A사는 올해 초 자사 온라인쇼핑몰 등에서 쓸 수 있는 가상화폐를 발행하기로 하고 리버스 ICO(가상화폐공개)를 추진했다. 리버스 ICO란 적용할 플랫폼과 사업모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진행하는 투자자금 모집이다. 적용할 플랫폼이 없는 상태에서 백서와 프로젝트 기획만으로 모금에 나서는 일반 ICO와 다르다.

A사는 해외에 ICO 담당법인을 설립하기로 하고 예산 20억원을 들여 1000억원 규모의 자금 모집을 준비했지만 지난 6월 포기했다. 정부가 강력한 ICO 규제 지침을 내놓을 경우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갈피 못잡는 정부에 ICO 시장 혼란… 대기업도 눈치만 보다 포기

A사 대표는 “우리가 추진한 ICO는 구체적 사업모델이 있는 투자자금 모집이었는데 정부가 ICO라면 무조건 규제하고 나서니 안타깝다”며 “정부의 명확한 ICO 지침이 있었다면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ICO 딜레마’ 빠진 국산 코인 개발팀

A사처럼 상당수 업체가 정부의 불투명한 제도 마련 탓에 ICO를 주저하다가 포기하거나, 연기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가상화폐거래소 설립과 함께 ICO를 추진 중인 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도 마찬가지다. 계획대로라면 올 상반기 진행했어야 할 ICO를 내년으로 연기해야 할 처지다. 이 스타트업 대표는 “정부가 ICO와 관련해 명확한 지침을 내놓을 것처럼 하면서도 수개월째 시간만 끌고 있다”며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발행된 국산 가상화폐는 모두 50여 개. 의료정보 교환용 가상화폐인 ‘메디토큰’, 지급·결제·쇼핑 등에 폭넓게 쓸 수 있는 ‘보스코인’, 현대BS&C가 내놓은 ‘HDAC’, 1세대 블록체인 기업인 글로스퍼가 개발한 ‘하이콘’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에 ICO 담당법인을 둔 곳은 하나도 없다. 대부분 스위스 싱가포르 홍콩 등에 법인을 설립한 뒤 ICO를 진행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ICO 제도를 마련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평가도 내놓는다. ICO를 빙자한 다단계 사기가 판을 치고 있다는 이유를 든다. 가상화폐업계에 따르면 가상화폐를 발행한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다단계 사기를 일삼다가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된 업체만 200여 곳에 달한다. ICO를 진행해 놓고는 백서대로 프로젝트를 실행하지 않아 투자자의 원성을 사는 경우도 잦다.

이렇기 때문에 ICO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는 게 가상화폐업계의 주장이다. 전하진 한국블록체인협회 자율규제위원장은 “스위스 주크시처럼 ICO는 허용하되 백서대로 진행하지 않거나 사기 여지가 포착되면 강하게 규제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갈피 못잡는 정부에 ICO 시장 혼란… 대기업도 눈치만 보다 포기

정부 “ICO 제도화할 법규가 없다”

정부의 ICO 지침 마련은 사실상 오리무중이다. 지난해 9월 “모든 형태의 ICO를 전면 금지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를 금지할 관련 법을 못 찾았고, 올 들어서는 거의 손을 놨다. 지난 5월 ICO 허용을 검토하라는 국회 4차산업혁명특별위원회의 권고가 나왔을 때도 금융당국은 “여전히 부정적”이라는 의견만 내놨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21일까지 국산 가상화폐개발팀을 대상으로 ICO 실태 전수조사에 나섰으나 관련 지침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가상화폐를 어떻게 볼지, ICO 제도를 마련할 때 어떤 법규를 기반으로 할지 등 아직 명확히 나온 결론이 없다”며 “이번 전수조사도 단순한 현황 파악 수준으로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ICO 관련 지침이 하나둘 마련되고 있다. ICO를 일찍부터 허용한 스위스와 싱가포르는 법인세 납부 비율 등과 관련한 지침이 명확하다. 미국은 가상화폐를 증권의 일종으로 보고 일반 기업공개(IPO) 수준의 절차를 요구한다.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주기적으로 ICO업체를 대상으로 조사를 한다. 일본은 등록된 사업자에 한해 ICO를 허용하며 네거티브 방식으로 규제한다.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