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국 선전에서 열린 국제전자생산설비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칭화유니의 전시 제품을 둘러보고 있다.  /노경목 특파원
지난달 중국 선전에서 열린 국제전자생산설비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칭화유니의 전시 제품을 둘러보고 있다. /노경목 특파원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세계 최대 생산설비 전시회 중 하나인 중국 선전 국제전자생산설비 전시회에서 지난달 30일 칭화유니의 중국어 이름인 ‘쯔광(紫光)’ 두 글자를 마주했을 때다.

칭화유니는 중국에서 가장 높은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을 보유한 업체다. 자회사인 창장메모리는 3차원(3D) 낸드플래시 양산을 앞두고 있다. SK하이닉스가 범용 생산설비를 팔겠다며 전시회에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하게 느껴졌다.

현장에 나와 있는 업계 관계자들은 “칭화유니그룹 소속이 맞다”고 확인해 줬다. 칭화유니가 반도체 생산설비 자체 제작까지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장비를 수출하고 있는 한국 기업에는 악재다.

◆반도체 생태계 구축 중

해당 회사 관계자도 “2016년 칭화유니그룹이 생산설비 업체인 르퉁과기를 인수해 생산설비 시장에 진출했다”며 “지난해부터 각종 전시회에 쯔광(칭화유니)르퉁이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내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르퉁과기는 1984년 홍콩에 설립된 회사로, 1999년 선전에 생산공장을 지으며 중국 시장에 진출했다. 자동화설비와 스마트공장설비 등을 생산하고 있다. 인쇄회로기판(PCB)에 회로선을 그리는 인쇄기의 생산 속도는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이 전자제품 생산에 본격 나서기 이전부터 관련 설비기술력을 축적해온 회사다.

이날 전시회에서도 쯔광르퉁은 기존에 만들어온 각종 스마트 전자제품 생산장비 및 검사장비들을 선보였다. 반도체에 회로도를 그리는 노광기나 가공하는 식가기처럼 높은 기술 수준이 요구되는 장비는 아니지만 전체 공정 흐름을 제어하고 다음 생산 단계로 실어나를 수 있는 제품들이다.

칭화유니는 쯔광르퉁을 반도체 장비업체로 업그레이드시킨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미 5억위안(약 820억원)을 관련 연구개발 등에 쏟았으며 기술개발 속도에 맞춰 추가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르퉁과기 인수 당시 칭화유니는 “반도체 품질과 생산 능력을 높이기 위해 자체 생산기술 향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칭화유니는 중국 정부가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조성한 200조원 규모 반도체펀드의 가장 큰 수혜를 누리고 있는 업체다. 한국 전자업계 관계자는 “반도체산업 육성과 관련된 중국 정부의 의사결정 하나하나가 칭화유니 행보로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그는 “중국은 단순한 메모리 반도체 양산을 넘어 생산설비까지 갖춰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판로 막히는 한국 업체

실제로 중국 기업들은 올 들어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업체들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오너 경영인의 지분 전체를 800억원에 사겠다는 제안이 있었는가 하면 다른 장비 업체는 올 들어서만 여섯 곳에서 인수 제안을 받았다. “한국 장비 업체라면 규모와 기술 수준을 불문하고 사려 한다”는 게 인수합병업계의 전언이다.

칭화유니 등 중국 업체들이 자체 생산장비 기술력을 강화하면 중기적으로는 한국 업체들 판로가 막힐 수 있다. 중국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품 경쟁력이 높아지더라도 관련 생산설비 업체는 투자 붐을 타고 실적이 계속 좋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이마저 힘들어질 수 있다.

사흘간 열린 올해 선전 국제전자생산설비 전시회에는 한국 업체 참가가 눈에 띄게 줄었다. 출품 업체는 한화를 포함해 8곳이었다. 30여 곳이 나온 일본은 물론 10여 개 업체가 참가한 대만보다 적었다. 최근 4~5년간 중국 업체들 기술 수준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현장에서 만난 한국 검사장비 업체 관계자는 “품질이 좋은 제품을 사려는 중국 업체들이 일본이나 독일 업체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중국 업체를 선택한다”며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겨 단가라도 낮추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선전=노경목 특파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