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게임 수입상 노릇하던 텐센트, 이젠 한국 게임사 '쥐락펴락'
15년 전만 해도 한국 게임이 중국 게임산업을 좌지우지했다. 당시 중국 게임업체들은 게임 개발사가 아니라 게임 유통업체에 가까웠다. 인기 있는 한국 게임을 수입하는 데 모두 혈안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중국 게임산업은 ‘만리장성’처럼 거대해졌다.

한국 게임으로 성장한 중국

2003년 중국 온라인 게임시장에서 한국산 게임의 점유율은 53%에 달했다. 상위 38개 게임업체가 57개 게임을 유통했다. 절반 이상인 30개가 한국 게임이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주요 중국 게임사들은 한국 게임 관련 기사를 번역하는 전문인력을 두는 등 한국 게임 배우기가 핵심 경영 전략이었다”고 되돌아봤다.

중국 게임업체들이 한국 게임을 모방하면서 자체 개발 능력을 키우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부터다. 낮은 수준의 웹보드 게임부터 만들었다. 한국 게임을 자국 내 유통해 확보한 돈으로는 해외 유망 게임사 인수와 개발인력 채용에 투입했다.

세계 1위 게임업체로 급성장한 텐센트도 이 같은 성공 방식을 철저히 따랐다. 텐센트가 한국에서 수입한 총쏘기 게임 ‘크로스파이어’의 동시 접속자는 중국에서 800만 명을 넘기도 했다. 텐센트는 이 게임 하나로 연간 1조5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텐센트의 또 다른 ‘캐시카우’인 한국산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수익은 지금도 연간 1조원이 넘는다.
한국 게임 수입상 노릇하던 텐센트, 이젠 한국 게임사 '쥐락펴락'
한국 게임으로 확보한 자금으로 텐센트는 해외 대형 게임사를 잇따라 인수했다. 2011년 온라인 게임 ‘리그오브레전드’를 개발한 미국 라이엇게임즈를 4억달러에 인수하며 세계 1위 온라인 게임업체로 도약했다. 이어 ‘스타크래프트’로 유명한 액티비전블리자드, ‘포트나이트’를 만든 에픽게임즈, ‘어쌔신크리드’ 시리즈를 개발한 유비소프트의 지분도 확보했다.

2016년에는 모바일 게임 ‘클래시오브클랜’으로 잘 알려진 핀란드의 게임 개발사 슈퍼셀을 86억달러에 사들였다. 오는 18일 개막하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시범종목으로 선정된 e스포츠의 게임 6개 중 3개가 텐센트 게임이다.

한국 게임업체에 투자하는 텐센트

텐센트는 한국 게임업계와 인터넷업계로 파고들었다. 카카오의 2대 주주 자리를 차지했다. 지난해 국내 게임업계 1위에 오른 넷마블의 3대 주주이기도 하다. 텐센트는 이들 회사의 이사회 멤버로 경영에 참여한다. 네시삼십삼분, 카카오게임즈 등 다른 국내 게임업체에도 투자했다.

국내 게임업체들은 텐센트와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세계 최대 온라인 게임시장이다. 중국 내 최대 게임 유통망을 가진 텐센트와 판매 계약을 하거나 지분관계를 맺는 게 ‘최상의 카드’로 통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최근엔 중국 정부의 게임 판호(유통허가) 문제 때문에 덜 하지만 한때는 어떻게든 텐센트와 일하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중국 업체들의 게임 개발 능력도 국내 업체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텐센트의 오로라스튜디오가 만든 PC 온라인 게임 ‘천애명월도’는 국내 PC방 점유율 10위 안에 들기도 했다. 국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총쏘기 게임 ‘배틀그라운드’의 모바일 버전도 텐센트가 개발했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 회장(중앙대 경영학부 교수)은 “그래픽 등 일부만 제외하면 중국 업체의 개발력이 더 뛰어나다”며 “이젠 중국에서 한국 게임을 굳이 찾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정부 지원 vs 정부 규제

중국 게임산업이 급속히 성장한 데는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중국 정부는 2012년 ‘12차 5개년 문화산업 배증계획’을 내놨다. 게임을 11대 중점 산업에 포함시켜 공격적으로 육성했다. 자국 게임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판호 정책도 시행하고 있다. 정부 허가를 받아야 게임을 유통할 수 있는 제도다. 또 중국에선 외국 업체가 홀로 게임을 판매할 수 없다. 반드시 현지 업체를 통해서만 유통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중국과 반대 방향으로 갔다. 정부가 만 16세 미만 청소년의 심야 게임 접속을 차단하는 셧다운제를 도입하고, 게임 사용 금액을 묶었다. 온라인과 웹보드 게임 규제는 게임업계를 위축시킨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국내 게임업체들이 온라인 게임 성공에 안주하다가 커지는 모바일 게임시장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점 역시 비판받는다.

정부 규제와 업계의 경쟁력 저하가 미친 영향은 여실히 드러났다. 일부 상위 업체들의 매출이 늘어나고 수출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글로벌 위상은 떨어지고 있다. 한국 게임업계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13년 6.3%에서 2016년 5.7%로 낮아졌다.

외교적 변수까지 작용해

중국 업체들의 공세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면서다. 시장조사업체 디지바이트에 따르면 지난 1년간 텐센트는 17억달러를 다른 게임 업체 지분 인수 등에 사용했다. 같은 기간 세계 게임업계에 몰린 전체 투자액(42억달러)의 40%가 넘는 규모다.

텐센트는 한국 펍지의 모회사 블루홀의 지분 인수도 추진하고 있다. 펍지는 지난해 세계 1위 총쏘기 게임으로 등극한 ‘배틀그라운드’를 만든 업체다. 텐센트가 지분을 인수한 회사가 만들거나 직접 유통하고 있는 게임 중 ‘던전앤파이터’ ‘리그오브레전드’ ‘크로스파이어’ ‘포트나이트’는 세계 온라인 게임 매출 상위 5위 안에 있다. 중국 2위 게임업체인 넷이즈는 지난 6월 ‘데스티니’로 유명한 북미 게임 개발사 번지에 1억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한국 게임업체들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3월부터 한국 신작 게임의 중국 내 출시를 허가하지 않고 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이 막혀 일본 대만 등 다른 나라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