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열기가 식으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그래픽카드 가격도 순식간에 내려가고 있다. 가상화폐 채굴 수요 감소와 그래픽카드 과잉 재고가 겹치면서 관련 제조업체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지난 1일 시장조사업체 존페디리서치는 올해 1분기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이 지난해 4분기보다 10.4%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작년 7억7600만달러(약 8400억원)에 달하는 GPU가 가상화폐 시장에 공급됐으나 채굴 수요가 감소하면서 시장이 줄어든 탓이다.
가상화폐 열기 식자… 그래픽카드 가격 '뚝'
◆코인 거품 꺼지자 채굴 수요 감소

GPU 시장이 위축된 원인은 가상화폐 시세 폭락에서 찾을 수 있다. 가상화폐의 ‘대장주’로 불리는 비트코인 시세는 작년 12월 1만9000달러를 돌파했으나 현재는 3분의 1 수준인 6500달러대까지 떨어졌다.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정부 차원의 가상화폐 규제가 이어진 데다 코인레일, 빗썸 등 가상화폐거래소에 연이은 해킹 사고가 발생하면서 불안감이 퍼졌기 때문이다.

GPU 수요가 업체들의 예상을 빗나간 영향도 컸다. 세계 최대 GPU 제조업체 엔비디아는 지난 2월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급격히 늘어난 채굴용 GPU 수요에 대비해 하반기까지 공급량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예측은 3개월 만에 뒤집어졌다.
가상화폐 열기 식자… 그래픽카드 가격 '뚝'
콜렛 크리스 엔비디아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지난 5월 콘퍼런스콜에서 “채굴용 GPU 수요가 3분의 2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공급 과잉으로 인해 일각에서는 엔비디아 GPU 30만 개가 반품됐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채굴 수요가 줄어들면서 한때 품귀 현상을 빚었던 그래픽카드 시장은 안정세를 찾고 있다. 온라인 가격비교업체 다나와에 따르면 가상화폐 채굴용으로 널리 쓰인 ‘지포스 GTX 1080 Ti’ 그래픽카드 모델의 최저 가격은 지난 2월 약 131만원을 기록했으나 이달 첫째주 약 101만원으로 24.8% 하락했다. AMD에서 제작한 GPU인 ‘라데온 RX580’ 일부 제품 중에는199만원까지 가격이 올랐다가 지난달 45만원대까지 내려간 제품도 있었다.

GPU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PC 제조사들의 사정도 나아졌다. 업계 관계자는 “GPU 수요가 늘어나자 공급업체들이 추가 물량을 확보했지만 재고로 쌓이면서 가격 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다”며 “이제는 공급이나 가격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픽카드 제조사들 울상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던 그래픽카드 제조업체들은 울상을 짓고 있다. 대만 정보기술(IT) 전문매체 디지타임스는 지난달 20일 주요 그래픽카드 제조업체 수익률이 평균 20% 수준까지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말 업체들의 수익률이 50%를 넘었던 것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로 줄어든 셈이다.

그래픽카드 판매량 역시 감소하면서 시장 전체가 침체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픽카드 제조업체 기가바이트는 지난달 27일 열린 실적발표회에서 2분기 그래픽카드 판매량이 전 분기보다 20만 대 줄어든 100만 대 수준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익성 악화로 시장을 떠나게 된 중소 채굴업체들이 본격적으로 중고 매물을 쏟아낸다면 판매량이 더 줄어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GPU 시장이 침체기에 들어가면 GPU용 메모리를 공급하는 국내 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최근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꼽히는 ‘GDDR6’ 그래픽D램(GPU용 고속 메모리) 공급 확대에 집중해왔다. 업계 관계자는 “GPU 수요 감소에 대비해 삼성전자는 2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2), SK하이닉스는 서버용 제품에 집중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